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녕 May 08. 2020

죽어도 좋아하는 걸 업으로 삼긴 싫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드라마는 내게 파리지옥이다. 


달콤하지만 적당히 즐기고 싶은, 적정선을 넘으면 달콤함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그래서 죽어도 드라마를 업으로 삼기는 싫었다. 참 재미있지. 그렇게 도망다니고 도망치다가, 결국은 시작이 되었다는 게. 





내 기억 속 최초의 드라마는 <토지>다. 맞다. 여러 번 리메이크되었던 박경리의 그 <토지>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최근 작품인 2004년도 작품을 보았다. 당시 또래들이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볼 때, 엄마 옆에서 <토지>를 보았다. 그때부터 나의 마이너, 매니아 드라마 취향은 확고했다. 고현정과 하정우가 주연으로 나왔던 한국 최초의 여형사 원톱 물 <히트>, 한국에서 처음 느와르 스릴러 장르를 개척했던 이준기의 <개와 늑대의 시간>을 좋아했다. 그때부터 줄줄이 PD, 작가, 음악감독 외우는 게 취미였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아도 OST를 워낙 중요하게 여겨서, 초등학교 6년 즈음엔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여우비>를 보고 양방언의 팬이 되었다. 양방언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내 롤 모델이다. 



한국 드라마 작가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단연 김영현과 박상연 콤비였다. <히트>부터 시작해서 <선덕여왕>, <뿌리 깊은 나무>, <육룡이 나르샤>, <써클: 이어진 두 세계>까지 두 사람이 보여주었던 드라마는 다른 작가들의 세계관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대장금> 시절부터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역사 왜곡은 분명히 존재할지라도 역사 덕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방법을 아는 작가 콤비였다. <써클: 이어진 두 세계>는 조금이나마 한국 SF 드라마의 미래를 엿보았던 작품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스달 연대기>로 망가진 두 사람의 세계관이 그만큼 안타깝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마을: 아치아라의 비밀>과 <붉은달 푸른해>의 도현정 작가를 좋아했다. 


이 시절 성준 참 좋아했는데
완벽했던 드라마. 나중에 출연진 사고만 빼면(...)


내 삶에 드라마가 없는 순간은 없었다. <모던보이>와 <선덕여왕>을 보면서 좋아하게 되었던 김남길이 아직도 가장 좋아하는 배우다. 고3 때도 <투윅스>와 <상어>를 몰래 보았고, 대학생 때는 <로맨스가 필요해> 시리즈를 연달아 보았다. 미국 교환학생 생활을 할 때, 같은 교환학생들과 나누어 보던 넷플릭스는 당시 한국에서 보지 못한 신세계였다. 2017년도 방영되었던 SBS 드라마 <원티드>는 어찌나 좋아했는지 3번이나 돌려보았다. 가출을 고민할 때는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며 몇 시간을 울었다. 


그만큼 드라마를 사랑했다. 




그래서 무서웠다. 드라마를 업으로 삼는 것이 무서웠다. 내가 드라마를 직업으로 삼았다가, 미워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내 대학생활은 도망의 연속이었다. 역사가 좋아서 수시 원서를 6개 중 5개를 사학과로 썼지만, 대학에 와서 내가 역사를 직업으로 삼을 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회학 복수전공/부전공을 고민하며 대학원을 갈까 고민했지만 그마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드라마를 피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길을 피하기도 하였다. 주변에 대학원에 진학하는 지인들이 많았기에 나도 저절로 그리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은 항상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랑하는 나의 10년 지기는 내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드라마를 선택했다 말한다. 그러나 내가 선택했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이리로 이끌려왔다는 표현이 맞다. 드라마로 글을 쓰고, 그 글이 주목을 받고, 드라마로 일을 해도 내가 여전히 드라마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업이 되면서 힘든 점은 있다. 시사회에 초대되어서 글을 쓰면 마감에 맞추어서 글을 써야 하고, 드라마가 온전히 취미였던 때보다 즐겨보지는 않는다. 더스토리웍스 기획 인턴을 하며 웹툰/웹소설 등 생소하게 느껴졌던 콘텐츠에 대해서도 더 잘 알아야 했으며, 내 취향이 아닌 드라마를 모니터링할 때는 눈이 돌아가고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를 미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취업 준비를 하며 모진 과정들을 겪으며 마음이 아파도, 먼저 드라마 현장에 뛰어든 동료들의 고난을 옆에서 들어도, 그래서 첫 취업 준비를 한 해를 지옥 같이 보냈어도 드라마가 좋았다. 스스로가 지독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이 시작을 믿어보려고 한다. 

제대로 내 마음을 마주한 시작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선의는 투쟁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