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일 지정생존자> 1-4화: 파워게임의 묘미
‘한국’에서 국회가 폭파되었다
미드 <지정생존자>가 한국 드라마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다소 의아했다. 시즌 1은 호평을 받았지만 그 이후 시즌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은 드라마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선 캐스팅을 보고는 기대했다. 믿고 보는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되었고 예고편도 괜찮게 나온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지정생존자>를 한국의 정치 상황에 맞추어 각색할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4화까지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적어도 70%는 성공했다고 본다.
이 드라마의 묘미는 누가 뭐래도 오프닝 씬이다. 박무진이 환경부 장관에서 해임되고 아내에게 “당신 짤렸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폭발해버린 국회의사당이 한강에서 보인다. (여전히 CG는 아쉽지만) 국회의사당이 무너지는 순간은 드라마 속 국민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에게도 그만큼의 충격을 준다. 만약에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삼풍백화점 사건, 세월호 사건에 맞먹는 트라우마가 한국 사회에 남을 것이고, <60일 지정생존자>는 그 지점을 잘 보여주는 드라마다. 이 총체적 난국 속에 박무진은 60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다.
내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니! 카이스트로 얌전히 돌아가려고 했던 내가!!
“좀 이상해서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박무진은 정치에 썩 어울리는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2화에서 박무진의 심리를 보여주는 장치는 양진만 대통령이 그에게 선물한 구두다. 처음 장관에 임명된 순간에도 클래식한 구두가 아닌 캐주얼한 로퍼를 신고 온 박무진은 불안할 때마다 구두를 움직이고, 세종시 사무실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불편한 구두를 벗어던져 ‘신데렐라’로 불린다. 그러니 김남욱이 탄식을 할 수밖에. 왜 하필 저 사람이 권한 대행이냐고.
그러나 박무진의 강점은 정치판에 어울리지 않는 특성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한미 협상을 할 때도 미세먼지 수치를 따지는 원칙주의자 이과 교수 출신 박무진은, 모두가 동의하는 순간에 의문을 던진다.
“좀 이상해서요"
킹메이커 차영진은 ‘사람 좋은 대통령’은 양진만 하나로 충분하다 말하지만, 60일 동안 자리만 지키고 있을 것만 같던 박무진은 자신의 선의로 인해 변화한다. 선의는 변함이 없는데 선의를 지키기 위해 방법을 모색한다. 북한의 잠수함을 무사히 인양하는 에피소드는 극적으로 북측과 통화가 이루어져 해결되었지만, 탈북민에 대한 마녀사냥을 멈추기 위해 대통령령을 선포하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박무진이 정치인으로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다. 박무진을 정치인으로 만드는 것은 권력에 대한 의지도 아니요,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의무감도 아니다. 바로 선의로 인한 싸움이다.
박무진을 위해 기꺼이 비서실장 자리를 내놓는 한주승이 말하지 않나.
박무진은 정치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라고.
“사람들은 멋대로 기대할 겁니다”
박무진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다른 캐릭터들 역시 드라마를 탄탄하게 구성한다. <이리와 안아줘>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 역할을 기가 막히게 소화했던 허준호는 무게감 있는 비서실장이 되었고, <마더>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악역 연기를 했던 손석구는 킹메이커 행정관으로 돌아왔다. 외부에서는 미국과 일본, 북한이 혼란한 틈을 타서 이익을 노리고 내부에서는 여야 가릴 것 없이 권한대행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기존 청와대 행정관들은 박무진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킹메이커 한주승과 차영진이 내뱉는 명대사들 역시 허준호와 손석구의 연기 때문에 가능하다.
“대행님의 의사는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기대하고 변덕스럽게 등을 돌릴 겁니다. 언론은 검증이라는 명분 하에 대행님을 흔들어댈 겁니다. 정적들은 친구, 친지 닥치는 대로 공격할 거리를 찾아낼 겁니다. 다시는 그 이전의 세계로 못 돌아갈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가족들까지도.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청와대 내부뿐만 아니라 파워 게임의 주인공이 되는 이들 역시 캐스팅의 힘이 크다. 야당 대표 역의 배종옥, 서울 시장 역의 안내상, 국회의사당에서 살아남은 국회의원 역의 이준혁까지. 박무진에게 멋대로 기대하고 위협하는 이들의 파워게임은 캐스팅으로 인해 더 살아난다.
“위험해서가 아님다 힘이 없어서디”
그러나 파워게임의 서사와는 별개로, 의외로 이 드라마가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다. 국회의사당 테러가 일어난 후 서울 시장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탈북민들을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정하고 탈북민들이 죽어나가는 과정이 현실과 멀지 않게 느껴졌다. 멋대로 여성들을, 난민들을,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결혼이주여성들을 마녀 사냥하는 땅이 여기다. 탈북민들이 편견을 느끼고 하다못해 조선족이라 거짓말하는 땅이 이곳이다. 그래서 탈북민 출신 김남욱 행정관 캐릭터가 더 반갑게 느껴졌다. 실력도 없는 대변인이 깝죽댈 때 주먹을 들며 그가 말하지 않는가.
“이 주먹은 아래로 향한다고 했심다.
그 사람들이 탈북민을 공격하는 건 위험해서가 아님다,
힘이 없어서디.”
정도보다는 마녀사냥과 싸움이 통하는 파워 게임의 세상에서 선의와 데이터의 권한대행 박무진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원작에서는 결국 주인공이 대통령 선거에서 이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 스릴러이면서도 지독한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김남욱의 말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리더는 현실에서 너무나 드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