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gal Mar 11. 2022

일 인분의 책임감과 부채감

잊지 말자

내가 뭐라고 이게 이렇게 견디기 힘들까 싶다가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가 너무 받아들이기 힘들어, 잠을 설치기도 하고 문득 떠오를 때마다 한숨을 쉬며 일상의 아주 작은 균열을 경험하고 있다.


대선은 항상 우리의 현실을 보여준다. 내가 어떤 버블에서 어떤 생각들을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든 내가 속해있는 사회와 지역, 더 나아가 국가의 합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결정”을 보게 된다. 고백하건대 단 한 번도 그 “우리의 결정”을 만족하며 받아들여본 적이 없다. 내가 지지한 후보의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여전히 적든 많든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후보를 지지한 “그네들”의 존재를 확인하며 좌절하게 된다.


혐오 프레임의 승리라는 표현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다른 의견이다. 내가 주변인들과 교류하면서 이해하게 된 건, 혐오가 이긴 게 아니라 이건 혐오에 대한 무관심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차별과 혐오에 대한 이야기와 논쟁이 그게 어느 쪽이건 피로감을 느끼고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 피곤해하며 피하는 문화가, 혐오가 내재된 혹은 메인으로 걸린 것은 그게 뭐든 상관없이 딜 브레이커라는 걸 아직 학습하지 못한 탓이다.


줄 세우기 좋아하는 문화에서 도대체 왜 누가 봐도 평균 이상인 자신을 여전히 억울하고 정책으로 인해 손해 본 대상으로 상정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집은 다 빚이라고 하면서 억울해하는 사람들은 안정된 직장이 없어 대출받을 조건이 안 되는 사람들을 시야에서 지웠고, 취업이 어려운 대학 졸업예정자들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들을 시야에서 지웠다.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미혼여성들을 보지 않았고, 남성들은 여성의 존재를 지우려고 최선을 다했다.  영어공부로 엄청난 돈을 지출하는 사람들은 같은 나라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을 만날 기회도 없고 만난다 해도 없는 셈 쳐버린다. 저마다의 이유로 억울한 사람들이 보복을 다짐하고, 그 기준에 따라 저마다의 차악을 고르는 투표는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나는 우리가 정치인을, 전 대통령을 그 보복으로부터 왜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왜 그런 어이없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국민뿐 아니라 정치인들도 핑계가 많고 억울함이 많으면 도대체 이 모든 것의 책임은 누가 지는 걸까.


선거권이 주어진 모두는 저마다 일 인분의 책임이 있다. 오래되신 분들은 누적된 큰 일 인분의 책임이 있고, 나는 나의 세월만큼의 책임이 있다. 나를 포함 우리 모두가 일 인분의 책임감을 다하며 이 시기를 보냈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온 데 우리 모두 책임이 있다.


책임의 뒷면을 보면 선택이 있다. 나에게도 상대적으로 조금 다양한 선택지들이 있다. 물리적 거리감으로 인해 생기는 정서적 거리감, 그리고 피부로 느끼는 게 없어 오히려 기괴함이 큰 기괴함으로 보이는 양상은, “내가 뭐라고…”라며 이 문제에 선 긋기를 가능하게 한다. 선거권이 주어지고 나서부터 살아온 시간의 반이 슬슬 해외에서 보낸 시간이 되어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비중은 커갈 거다. 다들 그 안에서 나름대로 괜찮다면 나는 무슨 권리로 마치 백 년 전 백인들처럼 “계몽”을 강요할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참여하고 분노하고 개입하기를 선택해야 할까. 독립운동하신 분들이 들으면 무덤에서 격노하시겠지만, 이 나라 잃은 것 같은 기분은 어쩔 것이며 그러면서 가장 빨리 드는 생각이 그냥 도려내버릴까 하는 거니 이것 또한 어쩔 건가.


나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믿고, 확실히 이것보단 더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루하지만 우리가 의무교육 과정에서 내가 배워온 가치들이 있고 기본만 지키면 된다. 최근에 알게 된, 독일의 시민이 되기 위한 시험문제의 많은 부분은 시민으로서 선거권을 가지게 될 때 알아야 할 기본적인 내용이다. 의회에서 최종 결정권을 가진 직위를 고르시오 같은. 우리도 시민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 시험에는 부동산이 있는가, 집값이 오르고 내리는 게 그리 중요한가, 부동산 정책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같은 질문은 없다. 다 같이 좀 더 책임감 있는 시민들이 되었으면 정말 정말 좋겠다. 인풋은 잠시 줄이고 소화를 시켜볼 시간이다. 나부터 돌아볼 기회다. 필요하다면 잠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게 가능한 게 내 럭셔리라 미안한 마음이지만, 딱 일 인분 만큼의 부채감만 가지려고 한다.


거르고 걸러낸 마음이 이렇다. 어쩌면 과잉반응일 수도 있다, 내가 뭐라고. 그래도 나는  인생과  사고방식에 대해서만 확실하게 이야기할  있기에, 정리할  이렇게 점심을 거르고 끄적여보았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저마다의 상황이 있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나의 이유와 상황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적어낸  어떤 이야기보다 “우리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이렇게 내가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능하게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낳은 결과에 대해 자유롭게 적어본 이야기다. 이제 제발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이야기할  있었으면 좋겠고,   건강한 비판과 토론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우리 이제 그래도 되지 않나.


https://youtu.be/0mzfbpmtL20

이 앨범 모두가 좋은데, 지금은 이 가사가 위로와 힘이 될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건방진 제품 혹은 건방진 서비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