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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al Jun 18. 2022

2022년 22-24번째 주

밀린 김에 3주짜리 정리

겨울에 태어난 아이라고 겨울을 사랑했던 시간이 길었는데, 쉽지 않은 겨울을 몇 번 나고선 여름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아름다운 여름날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길어지는 해와 함께 활기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일이 무척이나 바빴고 동시에 여러 가지 업무를 하면서 여러모로 소진되었던 순간, 상사와 면담을 했고 초과근무시간이 이미 너무 많으니 다른 동료들도 많이 쉬는 Pfingstferien에 쉬지 않겠냐고 반강제 휴가를 제안했다. 잠시(한 1분) 고민하다가 흔쾌히 오케이하고 그날 바로 사르데냐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고 그와 거의 동시에 숙소도 예약했다. 휴가를 갈 생각을 하니 스케줄을 정리해야 했고 납기에 맞추어 끝내야 할 것들의 진도를 조정했다. 그렇게 또 다른 바쁜 일주일+일주일을 보내면서 새로운 것들을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명상과 잦은 요가였다. 와잇피플이 좋아하는 동양의 것이라 제대로 하기 전부터 괜히 안 내켰었는데, 좋다고 소문난 데는 이유가 있고 베스트셀러는 과연 베스트셀러라는 걸 다시 한번 배웠다. 나란히 줄을 선 요가매트들 사이에서도 눈을 감고 호흡이 흐르는 길을 느끼면서 수련이 필요한 몸의 구석구석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어질 줄이야. 명상은 삶이 분주하고 정신이 너무 산란해서 시작해보고 싶었었는데, 어느 바쁜 저녁 눈을 감고 가이드를 따라 했던 한 세션 덕분에 한번 꾸준히 해보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궁금한 것도 많고 새로운 걸 너무 좋아한 나머지 무언가를 평생 해야 한다는 게 너무 무겁고 불필요하게 느껴졌었는데, 꾸준히 무리하지 말고 평생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가와 명상이 갑자기 이 시기에 찾아온 게 참 신기하고 감사하다. 겨우 첫 단락을 쓰고는 무슨 3주 사이에 은혜로운 간증인가 싶지만, 다시 기분이 쑥 좋아지는 기분이 역시나 여름 덕분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도 드디어 주변이 보이고 들릴 만큼의 여유는 생긴 거 같아 마냥 좋다.




H마트에서 울다


드디어 작가가 직접 읽어주는 오디오북을 끝냈다. 간혹 있었던 출퇴근길에 시작했다가 중간중간 눈물 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어 아이쿠하고선 고요한 산책길에 주로 들었다. 아름답게 쓰인 글이었고 그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 간절하고 찐했다. 마침 듣던 팟캐스트에서 좋아하는 두 분이 이 책을 소개하는 걸 재밌게 들었고, 이 분들이 음식을 중심으로 써 내려간 글을 보고선 음식에 각별한 애정이 있는 가정이었나 보다고 평하는 부분에서 떠나온 사람들만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게 따로 있긴 한가보다 하고 느꼈다. 어쩌면 그래서 한국에 가본 적 없는 사람들도 이 떠나온 사람들과 떠나온 사람들에게서 자란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겠구나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이 아닌 곳에서 자랐음에도 나보다 더 한국인처럼 자란 미셸 자우너의 이보다 더 솔직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편하고 익숙한 곳을 떠나 작지만 소중한 자기만의 영역을 꾸며나가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를 보기도 하고 섞이고 싶어 노력하면 할수록 더 부끄럽고 숨기고 부정하고 싶어지는 내 일부를 대하는 자우너의 태도에서 나를 보기도 했다. 한국말을 잘하지 못해도 누구보다 한국 엄마의 사랑방식을 기가 막히게 읽어낸 자우너 덕분에 우리 엄마를 떠올리기도 했고, 이 아픈 사랑이 언어를 넘어설 정도로 강력하고 해로울 수 있는지도 생각했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가족 모임에 뜬금없이 초대받는 경험을 제법 여러 번 했었는데 그 가족들 사이에 있으면 이 징글징글한 한국 가족들의 농도가 없어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서로를 너무 사랑(한다고 믿거나 사랑)해서 가족이 마치 자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대하는 매우 건강하지 못한 애정을 한 단계 걸러진 곳에서 읽어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참 했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다짐했던 것처럼 꼭 화해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었고 이 마침표 없이는 절대 다음 문장을 시작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한번 되새기는 경험이었다.

이번에 여행 갔다가 참여한 한 소규모 투어를 미국인들과 함께 했고 그중 하나가 신혼여행을 온 한국계 미국인이어서 아주 잠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부모님은 한국에 계시고 좋은 한국어 발음을 가졌지만 문장은 아직 서툰 이 분 덕분에 이 책이 다시 한번 생각났고, 이 책을 읽어봤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한국계 미국인들이 느끼는 한국에 대한 감정은 확실히 다르다. 그들은 이제 한국을 자랑스러워하고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한국을 떠나 사는 한국인들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막연한 믿음과 함께 지지고 볶는 한국도 나의 일부로 여기며 괴로워하며 살고 있고, 한국계 미국인들은 상황에 맞추어 두 나라의 좋은 것들만을 선택하며 살 수 있지만 진짜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살아가며 여행과 영상과 글로 외국을 접하는 한국인의 이 책에 대한 감상평이 신선하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하다. 함부로 타인을 보며 감상에 젖지 않으려고 하고, 그저 우리 모두 저마다의 싸움과 화해와 패배, 그리고 작은 승리를 경험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한다. 나 홀로 이런 복잡한 생각들에 잠기기 아쉬워서, 일독을 권합니다 :)




피키 블라인더스와 데리 걸스


다시 넷플릭스로 돌아온 나의 스트리밍 사이클, 이번엔 아일랜드에 흠뻑 빠졌다. 피키 블라인더스와 데리 걸스 둘 다 몇 번 시도한 적이 있는데 훅이 안와 첫 에피소드를 못 넘어갔었다. 그러던 중 내 취향을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추천을 받았고 너무 행복하게 시간을 낭비할 수 있어 좋았다. 피키 블라인더스는 우선 토미 셸비 역의 킬리언 머피가 너무 섹시하고 내 스타일이라 열심히 볼 수 있었다. 신기했던 건 예전에 영화 마스크를 보면서 피터 그린에 푹 빠졌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고, 두 이름을 같이 검색하면 둘을 동일인물인 줄 안 사람들의 지식인들이 이어지는 걸 보고 웃을 수 있었다. 영국판 대부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라/문화별로 조폭 영화가 쓰이는 방식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알게 된 걸 보니 영국판 대부도 틀린 설명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뜬금없이 송강호의 얼굴이 떠오르고 (절대 내 스타일 아님...) <효자동 이발사>와 <관상>이 같이 떠올랐는데, 아마도 격변하는 시대에 민첩하게 기생하면서 모럴이라고는 개나 준 사람들이 결국은 신념을 갖게 되는 이 이야기가 어쩐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머리가 심히 좋아 평범하게 살 수 없었던 토미를 보면 생각나는 또 다른 캐릭터는 바이킹스의 라그나르다. 한 명은 말을 돌보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거고 또 다른 한 명은 적당히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으면 행복했었을 텐데, 멈추는 법을 몰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끝을 향해 달려가야 했던 사람들이라 더욱 닮아보였던 것 같다. 토미 말고도 모든 캐릭터들이 하나하나 살아있는 멋진 드라마고 여성주의를 마초 스토리에 이렇게도 섞어 넣을 수 있구나 하는 걸 잘 보여줘서, 보는 동안 엄청 즐거웠다. 로마니라고 불리는 아이리쉬 트래블러(집시x, 이건 데리 걸스에서 아주 야무지게 가르쳐준다)들의 삶도 새롭게 알게 됐고, 웨건과 자연과 말과 함께 살아가는 이 가벼운 삶이 묘하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요즘 타이니 하우스에 사는 사람들이 이 트래블러들과 닮아 보이는 것도 신기했다.

잠시 곁길로 새자면, 동양의 무소유는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결이 같고 방향성은 오히려  가까운 집시의 삶은 추앙받지 못하는  보면 서양 사대주의하는 동양의 모습이나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나  똑같구나 싶었다.


이와 관련해서 재밌는 글을 봤다: Do not ask a woman about her age, do not ask a man about his income, and do not ask Europeans their views on gypsies.  https://www.rug.nl/frw/education/related/human-geography-remastered/caravan-dwellers-versus-the-tiny-houses-movement-04-11-2020?lang=en​​ 


샌 김 한번  새보자면,  중에서  갱들이 자꾸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묘하게 멋있어서 나도 굳이    있는 아이리쉬 위스키를 그렇게 털어  모금 마셨다가 타는 목구멍이라는 새로움 감각을 만났다. 고량주나 보드카 샷이랑은 달라달라.

다른 시리즈인 데리 걸스의 배경은 1990년대의 북아일랜드다. 이 드라마는 진짜 너무 웃기다. 카톨릭 여학교에 다니는 노동층의 네 소녀와 어쩌다 끼게 된 영국인 남자애의 이야기인데, 너무 웃기다는 거 말고는 다르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예전에 첫 편 보고도 재밌어 보여서 계속 보고 싶었는데 발음이 너무 낯설어서 좀 보다가 엥 하고 접은 기억이 있다. 이번에 사르데냐에 다녀오면서 느낀 거지만, 나는 이런저런 사연이 많은 나라 혹은 이제 더 이상 나라가 아닌 지역들과 잘 맞는 것 같다. 남에게 사연을 주는 나라들과는 잘 안 맞음... 아직 아일랜드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올 늦여름이나 가을에 아일랜드에 가서 흑맥주도 마시고 아이리쉬 위스키도 한 병 사 와야지.






테니스를 하다가 발목을 다쳐서 테니스도 달리기도 못했지만, 덕분에 요가 시간도 늘렸고 휴가 가서 투명하고 부드러운 지중해 바다에서 수영을 신나게 했다. 해변에서 책 읽고 낮잠 자다가 등에 화상을 입었지만, 매일 조금씩 더 밝아지는 머리색과 살짝 더 짙어지는 피부색이 제법 마음에 든다. 휴가 가기 전날 상사한테서 리워드 카드?를 받았다. 이틀 연속으로 두 워크숍에 같이 참여했는데 잘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팀에 기여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고 팀에 있어주어 고맙다는 메시지였다. 오늘의 나에게는 에스프레소 한 잔의 값어치도 안 되는 작은 메시지였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 나도 그런 줄은 알고 있었지만 :) 막상 들으니 또 좋은 말. 이렇게 막 좋았다가 막 싫었다가를 반복하다 보면 한 해가 가 있더라고. 그래서 팟캐스트에서 들은 것처럼 좋을 때 좋다고 말해놓고 싫을 때 얘네들을 꺼내봐야지 한다. 건강도 이때 미리 선불로 내놓고 말이지.


여름이 좋은 지금이 내 청춘인가, 여름을 좋아하게 된 나는 이제야 청춘을 받아들이게 된 청춘 이후인가 아직도 헷갈리지만, 또 알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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