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살아남은 당신, 과연 완생(完生)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아름다운 무인도를 한 노인이 구입했다. 노인은 이 아름다운 섬을 잘 가꾸어 낚시꾼들에게 개방했다. 육지에서 섬으로 이동이 빈번해진 낚시꾼들의 배를 타고 육지의 쥐도 하나 둘 섬으로 들어왔다. 천적도 없이 먹을 것이 풍부했던 이 섬은 곧 쥐들로 들끓게 되었다. 노인은 쥐를 잡기 위해 묘안을 생각했다.
땅을 파고 큰 드럼통을 묻어두고는 그 안에 먹을 것을 넣어주었다. 미끼에 이끌려 이내 그 섬의 모든 쥐들이 그 통 안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노인은 통 안에 든 쥐에게 더 이상 먹을 것을 넣어주지 않았다. 쥐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자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급기야 통 안에 쥐가 두 마리만 남게 되자 노인은 이 두 마리의 쥐를 통 안에서 꺼내 섬에 풀어주었다. 그 후 섬에는 더 이상 쥐가 늘어나지 않게 되었다.
인원감축을 해야 하는 어느 대기업의 구조조정팀원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누군 남기고, 누군 내보내야 하는 결정을 앞두고 본인이 끝까지 살아남게 되어 섬 안에 풀어놓은 쥐가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한다. 동족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버린 그 쥐를, 우리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우생한 존재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취업에 관한 신간을 준비하면서 완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생의 각축장을 들여다본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상품이 되기에 혈안이다. 매 순간 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선택되기 위해 다양한 스펙으로 포장하는데 급급하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쓰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혹은 그 누군가를 밟아 올라서서라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대학에 가면 그나마 한숨 돌릴 줄 알았을 이들의 희망은 취업전선이 마지막 관문이기를 바란다. 모든 것을 다음으로 미루고 어디든지 당장 취업부터 해야 한다. 잘릴 걱정 없는 직장에 오래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알까?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는 이들부터 30대, 40대, 60대 등 얼마 가지 않아 같은 고민으로 끊임없이 다시 선택하게 된다는 것을. 나의 역량을 키우는 일과 병행하여 혼자만이 아니라 내 옆의 동료들과 드럼통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야 내게도 계속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을.
가장 수월하게 누군가를 통제하는 방법은 연대할 생각도 아예 하지 못하도록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바로 그 사람의 ‘먹고 사는 수단’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고민 없이 허겁지겁 오늘의 시간을 채우는 당신은 통제 당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족을 잡아먹던 쥐들은 그 섬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