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이미 한 번 헤어졌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간밤에 썼던 두 편의 글부터 생각이 났다. 다시 천천히 읽어보았다. 결론은 나는 상처받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것이었다. 조금 쓰린 마음으로 하루 업무를 시작했다. 그렇게 점심을 차리기 위해 부엌으로 가는 중에 문득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다.
만난지 6개월 남짓 안되었을 때 잦은 다툼으로 서로 지친 상태에서 남자친구가 그만하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전화로 전해들은 그 한 마디에 잠시 마비된 듯 싶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남자친구를 바로 만나러 갔다. 그때 나도 상당히 지친 상태였지만 지난 시간동안 맞추고 노력한 관계가 이제서야 시작될 것이라 생각한 시기였기에 놓을수 없었다. 결국 마음을 돌린 남자친구와 다시 연애를 이어갔지만, 한 번 이별을 고한 상대와 만나는 것은 힘들다. 이민기와 김민희가 나왔던 연애의 온도에서 결국 헤어졌던 비오는 날의 놀이공원 장면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해 반복재생되었다. 그렇게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있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마음먹고자 노력했었다.
당시 일이 바쁜 남자친구는 부정적인 것에 매몰될 때가 많다. 이별을 말한 당시에도 우리 관계에 대해 좋은 부분은 다 잊은 상태였단 걸 알자마자 나는 그날 밤 관계보고서를 작성했다. 서로가 원하는 연애, 장.단점, 서로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부분 등을 목차로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수첩을 사서 각자 떠오르는 공통의 주제로 키워드를 써서 대화를 나눴다. 우리의 부족한 생각의 차이, 서로를 알아가고자 노력하는 소통의 과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별 이전의 남자친구와 이별 이후의 남자친구를 분리해 생각했다. 그 말을 했던 시기 이전의 남자친구를 ‘전남자친구’라고 부르며 개그소재로 삼았고, 새로운 상대와 연애하듯 여태 못본 부분들을 발견했다. 한 달 동안 나는 내가 연애를 하고 있는 상태가 언제 깨질 지 모르는 살얼음판인지, 비온 뒤 굳은 땅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완전히 괜찮아졌고 서로를 더욱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분명 다툼으로 지쳐 이별을 말한 것과 이번의 위기는 몹시 다르다. 남자친구는 나를 사랑하면서 다른 이성에게 가는 관심을 조절하지 못했고, 나는 우리 관계의 문제와 남자친구의 문제를 인식했다. 어느 누가 보아도 더 어렵고 상처받을 험난한 길이다. 그래도 궁금했다. 이 사람과 내가 진짜 인연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나아갈지 궁금하다. 한때 나는 연애를 한다는 것은 곧 상처 받을 용기를 내어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용기로 다른 사람을 내 삶의 공간에 들이는 것이라고. 이쯤에서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뻔히 상처받을 선택을 해야겠냐고. 나는 애정결핍에 회피형, 불안형 모두를 가진 불안정형이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데 문제가 많다. 그래서 일부러 힘들 것이 뻔한 선택을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른다면 나는 가보는 편이다. 이렇게 사랑한 마음은 끝이 나더라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어났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고 오늘 하루에 대한 긍정적인 기운을 보냈다. 남자친구는 어딘가 다운된 목소리다. 같이 다운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