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맥파이앤타이거 Apr 03. 2023

[차와 닮은 삶] 차 한잔을 나누며 마무리하는 하루

Date 2023.04.03 / Editor 버들


나에게는 늘 멀리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사이인 친구가 한 명 있다. 일본인인 친구와 나는 처음부터 일본어도 한국어도 그렇다고 영어도 아닌 제3의 언어로 소통했다. 전공도 같고 성향도 취미도 비슷하여 앞으로도 비슷한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했었지만, 첫 만남으로부터 15년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삶의 모습은 퍽 달라져 있다.



몇 년 전 보름간 일본으로 친구를 보러 갔다. 반가운 친구가 왔다고 임의로 멈춰 세울 수 없는 친구의 일상에 나는 기꺼이 함께 올라탔다. 아침이면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자전거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친구 직장 앞에서 헤어져, 나는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후에는 친구의 퇴근 시간에 맞춰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간단히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 남편이 퇴근하면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책을 읽거나 퍼즐을 맞추거나 보드게임을 했다. 아빠가 아이들과 목욕을 하는 동안 친구와 나는 주방과 집안 정리를 마쳤고, 목욕으로 나른해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면 우리는 침실이 있는 2층에서 살금살금 내려와, 마침내, 마침내 찻물을 올렸다.



그리고 이 시간은 방금 마무리된 빈틈없는 하루와 곧이어 시작될 또 다른 빈틈없는 하루의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었다.




녹차와 검은 콩과 현미를 블렌딩한 구수하고 편안한 차를 티팟에 우려 찻잔 두 개에 나눠 홀짝이며 우리는 매일 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삶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과 후회와 자책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선물처럼 찾아오는 사소한 행복들을, 원했지만 가지지 못한 것과 원치 않았지만 어느새 내게 맡겨진 것들을, 학위가 쌓이거나 아이가 셋이 되도록 아직도 잘 모르겠는 것투성이인 이 불완전한 인생을, 그러나 그 가운데 남몰래 마음에 품어보는 희망을.



함께 지낼 보름을 계획하며 우리는 그 시간이 어떤 모습일지 예상하기 어려웠지만 단 한 가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매일매일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도란도란 나누는 저녁이 있으리라는 것. 실제로 일상을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바라고 기다려 온 유일한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보름간의 그 저녁이 앞으로 오랫동안 일상을 버티는 힘이 되어주리라는 예감도. 언젠가 모든 일을 겪고 나서 무심히 돌아가면, 무슨 이야기든 듣고 응원하고 위로해 줄 준비가 된 친구가 나를 위해 차를 끓여주는 저녁이 있다.



동아시아의 좋은 차

Magpie&Tiger


www.magpie-and-tiger.com

@magpie.and.tiger




‘차와 닮은 삶’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고 느꼈던 차와 닮은 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글, 이미지, 영상, 사진 무엇이든 좋아요. 이것도 차와 닮은 삶이지 않을까? 라는 작은 이야기를 던져보고 싶은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차와 닮은 삶] 깨진 도자기를 수리하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