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벼움과 살아야 할 무거움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영원한 회귀는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9)“네가 너의 삶을 살고자 원하느냐? 그런데 너의 삶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처럼 무거운 인식이 없다. 니체의 철학이 정말 어려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삶을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라도 너무 무겁게 대하지는 말라는 의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철학적 사상으로 시작해서 역사의 시간과 개인의 시간, 철학적 명제 등이 서술되어 읽는 이에게 당혹감과 호기심을 선사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밀란 쿤데라의 조국 체코의 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치, 혁명, 이데올로기 등 무거운 것들에 비해 인간 개개인의 삶이란 얼마나 가볍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인가. 그는 소설에서 지식인들이 겪는 수난과 좌절,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을 가벼움과 무거움을 빗대어 역사 그 자체보다는 역사의 수면 밑에서 움직이는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육체와 영혼, 집단과 개체, 삶의 의미와 무의미,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우연과 운명 등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곳곳에서 번뜩인다.
토마시 ‘ 가벼움속의 무거움’, 테레자 ‘무거움 속의 욕망’, 사비나 ‘배반된 세계를 갈망하는’, 프란츠 ‘무거움에 던져진 실존’. 소설 속의 4명의 등장인물의 삶을 보고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해 본다. 개인의 삶 속에 내재 된 가벼움과 무거움을 철학적이고 문학적으로 표현한 생존 작가의 작품은 이 소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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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연산이 너무 싫어, 단순 반복 계산만 하잖아?” 딸이 나에게 초등 수학 연산을 매일 하면서 한숨을 쉬며 불평을 늘어 놓는다. 딸은 4년째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단순하게 계산기처럼 계산만 무한 반복한다. 동일한 것의 반복, 반복된 연산이 딸에게 무거움으로 작용했다. 익히고 배워야 할 학습에는 무언가의 새로움은 전혀 없었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9) 소설 속에서도 현재 겪고 있는 생이 동일하게 무한히 반복되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연산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엄마에게 못한 말을 용기 내어 말한다. “연산, 그만하고 싶어.” 순간 정적이 흐른 후 나는 말했다. “그만하자.”
우리는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떠올릴 때가 있다. 놀이나 일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묻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놀이나 일이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나 일을 해야 할 때이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나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다.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무거움으로 느껴질 때이다. 딸은 연산을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면서 ‘왜 이 짐을 짊어져야 하지?“라고 묻게 된 것이다. 동일한 것의 재미없는 반복, 딸에게는 연산이 무거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연산을 그만 시켰지만 연산을 다른 방식으로 변화 시켜 놀이로서 만들어 보도록 했다. 곱셈, 나눗셈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 낸 문제집을 채택해 연산의 무거움을 보완해 나갔다. 니체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말하며, “영원히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생성과 소멸의 운동만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영원회귀의 세계상이라고 설파했다.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형식을 변경해 수학이 무겁지 않도록 생성했고, 이전 형식을 소멸 시켰다. 수학 공부 방식의 생성과 소멸을 통해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변용했다. 또한 딸은 긍정하며 수학문제를 풀어 나가고 있다. 그만하고 싶다며 용기를 내어 준 딸에게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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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토마시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베토벤의 4중주를 몰랐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토마시에게 <오이디푸스>는 그의 삶에 결정적 무거움을 선사한다. 폴리보스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줍지 않았다면, 소포클레스는 그의 가장 아름다은 비극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토마시가 <오이디푸스>를 읽지 않았으면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는 테레자를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버려진 아기로 생각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336)
“토마시는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의들이 악쓰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 탓에 이 나라는 향후 몇세기 동안 자유를 상실했는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자, 당신 주위를 돌아보셨나요? 참담함을 느끼지 않나요? 당신에겐 그것을 돌아볼 논이 없는지도 모르죠! 아직도 눈이 남았있다면 그것을 뽑아 버리고 테베를 떠나시오.”(289) 토마시는 체코 작자 동맹이 발간하는 주간지에 글을 투고한다. 오이디푸스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이고 동침을 나누었던 여자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낫듯이 체코의 공산주의자들을 위와 같이 표현하며 지식인의 변절을 적나라게 표현했다. 자신이 투고했던 글 때문에 그는 결국 의사의 그만두고 프라하를 떠나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토마시에게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토마시는 ‘에로틱한 우정’을 나누기를 선호했고 구속되는 삶을 싫어했다. 하지만“여섯 우연의 소산인 그녀, 외과 과장의 좌골신경통에서 태어난 꽃 한 송이, 모든 ‘es muss sein!‘의 피안(彼岸)에 있던 그녀,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가 되었다. (353) “그를 필연으로 내몬 것은 우연도, 외과 과정의 관절염도 아니며 외부에서 유래한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314) 또한, 토마시가 의학에 이끌린 것은 가슴속 깊이 뿌리내린 이 ‘es muss sein!’이었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끌어당김은 6번의 하찮은 우연의 연속 때문이고, 그 우연은 더 이상 빠져 나갈수 없는 필연으로 변했다. 의사라는 직업도 그러했다. 삶은 우연의 우연을 통해 이어지고 동일한 우연이 같은 시간 동안 일어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우연의 마주침에서 토마시는 하필이면 2번의 필연이 그를 무거움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게 했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357) 결국 선택 이후의 결과에 따라 좋은 선택인지 알 수 있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행위의 과정에서 의미를 부여를 통해 결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임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리스본행 야간열차> (116) 인간은 우연의 사건에 ‘es muss sein!’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필연으로 우연의 사건을 필연으로 만든다. 필연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며 후회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우연은 우리를 삶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토마시는 테레자와의 6번의 우연이 그의 삶을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옮겼다. 생의 마지막에는 농촌 전원생활을 하면서 테레자를 만나기전의 가벼움과 다른 가벼움으로 삶을 마무리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가벼움을 단순한 가벼움으로 말하고 싶다.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중략)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506) 이곳은 테레자와 카레닌이 그와 함께한 행복이고, 자신이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 일을 했다. 그는 내면적 ”es muss sein!“에 의해 인도되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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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서구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영혼(정신)과 신체(육체)로 나누어서 이해해왔다. 그들은 영혼에는 불명성과 완전성의 지위를, 신체에는 유한성과 불완전성의 지위를 부여했다. 영혼과 신체에 대한 그들의 비유를 보고 있으면, 영혼은 마치 하늘에서 죄를 짓고 지상에 내려왔다 깨달음을 얻어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고뒤한 운명의 존재이고, 신체는 영혼으로부터 생명력을 잠시 얻었지만 영혼이 떠나자마자 다시 대지로 돌아가야 하는 천한 운명의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 그리그 현대 의학에 이르기까지 영혼과 신체는 철학자와 과학자의 오랜 관심사였다. 물론 아직까지 합의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가 키스를 했을 때, 그녀의 입술은 호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성기가 젖어 있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당황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흥분했고 그 때문에 흥분이 더욱 고조된 것을 느꼈다. 254
“그녀는 처음으로 그녀 눈에 비친 육체에 매료되었다. 그녀 육체의 개성, 흉내 낼 수 없는 단일성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모든 육체들 중에서 가장 범상한 것(지금까지 그녀는 그렇게 보아 왔다)이 아니라 가장 비범한 육체였다.” (254)
“두뇌 속 시계 장치에는 반대 방향으로 도는 톱니바퀴가 두 개 있다. 하나에는 눈이 있고, 다른 쪽에는 육체 반응이 있다. 나체 여자를 보는 시작이 새겨진 톱니는 발기 명령이 새겨진 반대편 톱니와 맞물려 있다.” (379) 남성들의 내 의지와 관계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신체,
영혼과 육체를 둘러싼 논란은 앞서 말했듯이 오랜 관심사이다.
테레자가 신체에서 느꼈던 것은 영혼과 신체의 별개의 것이라는 이원론(Dualism)과 하나라는 일원론(Monism) 중 무엇일까? 화자는 또 하나의 예화를 제시한다. 니체의 토리노의 말이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중략)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471) 데카르트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사유하는 것’과 ‘공간을 차지하는 것’, 즉 정신과 신체라는 두 실체로 나누어진다. 정신은 주체적, 능동적으로 활동하지만 물질은 기계적 인과 법칙에 따른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는 사실에는 필경 심오한 물리적 일관성이 있다. 인간은 소유자이자 주인인 반면, 동물은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 즉 Machina Animata에 불과하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468)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에 따라 인간 역시 ’생각하는 주관으로서의 정신과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몸‘을 가진 이원적 존재로 파악했다. 신체가 기계와 같이 같은 작용을 한다고 보면서 동시에 정신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송과선이라는 작은 부위를 통해 정신과 신체가 상호작용한다고 여겼다. 영혼이 신체를 지배한다는 생각이었다.
테레자는 기술자와의 정사를 보내면서 영혼의 문제를 깨달았다. 신체는 그녀의 영혼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의 신체임을 깨달았다. 신체는 그녀를 배신했다. 근대까지 지배했던 영혼과 신체의 세계관을 테레자와 니체는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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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또 다른 남성 주인공, 프란츠는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에서 사는 몽상가이다. 그는 사비나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어 소련의 제국주의가 침략한 캄보디아까지 이끌려왔다. 그에게 비친 사비나는 하나의 ’키치‘이자 무거움이었다. “키치의 원천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다. 하지만 존재의 근거는 어떤 것일까? 신? 인류? 투쟁? 사랑? 남자? 여자? 여기에 대해선 각양각색의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각양각색의 키치도 있게 마련이다.” (417) 프란츠에게 ’키치‘는 대장정을 위한 신념이었다. “프란츠가 미치도록 좋아했던 대장정이라는 개념은 모든 시대와 모든 성향의 좌익 인사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정치적 키치였다. 대장정이란 멋진 전진, 장정이 대장정이기 위해서 필요했던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우정, 평동, 정의, 행복을 향해 멀리 나아가는 노정이었다.”(417) 키치는 사회 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를 말한다. 키치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제약하는 체계이기에 오히려 더 맹목적이고 위험히며 무거움으로 대변될 수 있다.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말보다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신념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신념은 말 그대로 ’굳게 믿는 마음‘으로 굳게 믿기에 쉽게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신념은 무엇인가를 향하게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놓치게도 만드는 양날의 검이다. 사람이 키치를 갖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415) 생각의 체계가 키치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스탈린 아들의 똥에 관련한 예화는 ’똥‘을 가벼움의 상징으로 나타낸다.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399) 키치는 무겁고 폐쇄적이다. 원래 목적을 훼손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 키치가 전체주의나 군중심리와 결합하면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 인간은 이런 과정을 통해 초래된 비극을 드물지 않게 목격했다. 키치를 갖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키치는 절대적 신념이 아니다. 역사적, 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사상과 의식체계일 뿐이다. 따라서 절대적이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프란츠는 대장정으로 일컫어 지는 키치의 무거움에 던져진 실존이다.니체의 주장처럼 때로는 신념이 거짓말보다 더한 진리의 적이 되어 죽음으로 이르게 된다. 소설 속의 프란츠를 보며 삶에서 나의 키치는 무엇이고 그것으로 인한 삶의 무거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결국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단 하나의 믿음은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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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가벼움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여자 주인공 사비나. 그녀는 자신의 세계관으로 삶을 펼치고 삶을 예술로 만드는 사람이다.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156) 그녀는 배신을 즐기고 배신을 삶의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실존이다. 1968년 ’프하라의 봄‘의 시기의 여성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경제적 자립과 예술적 독립 공간을 가진 주체적 여성이다. 그녀는 키치를 경멸했다.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하기 때문이다.”(407)
그녀의 예술세계는 기존 관념이나 전통을 부정하는 다다이즘과 닮았다. '다다이즘(dadaism)'은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말부터 프랑스, 독일, 스위스, 미국의 미술가와 작가들이 본능ㆍ자발성ㆍ불합리성을 강조하면서 기존의 관습적인 예술에 반발한 종합예술운동이다. 사비나는 자기 그림의 의미를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 명명했다. 다다이즘의 작품 중 하나인 '게오르게 그로스'의 사진를 보면, 게오르게 그로스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미술 비평가를 뜻한다. 작품에서 비평가의 눈과 입은 대충 그린 종이로 덮여 있는데, 이는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이다. 비평가 목 뒤의 지폐조각은 작품의 비평가가 돈을 밝힌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비평가가 들고 있는 창의 모습을 한 연필은 그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사비나의 세계와 유사한 작품이다. 다다이즘의 '다다'란 원래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다다이즘에서는 다다이즘의 본질인 무의미함을 뜻하는 단어이다. 무의미함과 가벼움은 일맥상통 하지 않는가. 사비나의 배반된 세계는 무의미이자 가벼움, 아름다움이다.
“지금까지는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 주곤 했다.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202) 배반은 그녀에게 새로움과 즐거움을 주었다. 하지만 배반된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은 공허의 상태이다. 그녀가 말한 ‘공허의 상태‘는 무엇일까? ’가벼움‘이다. 사비나는 키치를 부정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벗어나는 것을 즐겼다. 만약 그녀가 키치를 수용하고 사람들과 지속적 관계를 가졌으면 그녀의 성향상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무거움‘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된 상태를 두고 니힐리즘(허무주의)이라 명명하며, 이러한 니힐리즘의 상태야말로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이라고 했다. 나는 사비나의 공허의 상태를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국은 죽는 ’니힐리즘‘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동묘지를 거닐며 죽음이라는 필연 앞에서 사색하는 예술가이다. 인상에 남는 등장인물이 있다. 활자를 읽으면서는 토마시였다. 하지만 활자를 쓰면서 인상에 남는 인물은 사비나였다. 소설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인물은 사비나 뿐이다. 테레자와 토마시는 무거움의 분위기 속에서 죽었다. 프찬츠 또한 무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사비나는 배반의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찌보면 가벼움이 삶의 생성과 변화, 소멸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니체의 춤추추는 자는 가벼운 자이고 어린아이처럼 노는 아무런 목표나 의미 없이 기쁨 속에서 파괴와 창조를 거듭하는 ’디오니소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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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가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4인의 주요 등장인물과 카레닌 그리고 국가, 전쟁, 똥 등 가벼움과 무거움일 것이다. 이 소설을 덮으며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지를 생각해 본다. 한 문장은 “einmal ist keinmal, 한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358)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사형선고를 받는다. 삶은 단 한번 쁜 유일회성을 갖는다. 이 순간은 아름답다. 이 순간은 우연의 시작이다. 하지만 죽음은 필연이다. 우리는 가벼움으로 태어나서 무거움으로 일생을 마친다. 이 소설은 니체의 철학적 식견으로 쓰인 작품이다. 그만큼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니체적으로 표현해 주었다. 주요 등장인물 4명 중 3명은 무거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테레자의 반려견 카레닌도 죽음을 맞이했다. 니체는 죽음의 고통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또렷하게 깨어 있는 정신으로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삶을 긍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자고 했다. 그는 또한 그가 보기에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가장 경멸할 만한 조건들 아래에서의 죽음이며, 자유롭지 않은 죽음, 제때에 죽지 않는 죽음, 비겁한 자의 죽음”이라 했다. 니체는 삶을 사랑하는 자라면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으로 죽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해 당당해지려면 삶 앞에서도 당당해야 한다. ’einmal ist keinmal‘ 내 삶은 단 한 번뿐이다. 매일 이어지는 우연 속에서 당당히 순간을 긍정하고 삶을 사랑하자. 아모르 파티(Amor Fa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