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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의맛 Sep 20. 2020

5. 꿈꾸던 시간

방송 제작의 길을 택한 이유와 과정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신입생들을 모집하기 위한 교내 동아리들의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딱히 동아리엔 관심이 없었고 당번이라 그저 방과 후에 교내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중학교에서 올라온 친구가 나를 불렀다. '방송부 면접 보러 가자!'라며. 방송부? 좀 지루하게 들리긴 하지만 한번 볼까 하고 친구 따라 방송실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나의 방송인으로서의 길이 시작되었다.


나름의 압박 면접을 거쳐서 방송부에 들게 되었고 생각보다 하는 일들이 많았다. 크게 교내 공지사항 알리기, 학교 행사 음향과 촬영 담당 그리고 학교 축제 때 상영할 영상들을 만들었다. 나름대로 학교에선 전통 있는 부서였기 때문에 졸업생들의 애정도 대단했고 그들은 우리에게 아나운싱, 촬영, 편집 등을 교육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영상 제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몇 가지 파트 중에 엔지니어를 택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촬영을 하는 내 모습도 뭔가 멋있어 보였고 윈도우 무비 메이커로 시작했던 영상 편집에도 재미를 붙여갔다.


대학 입학 후 원했던 신문방송학과로의 진학은 물거품 되었지만 또다시 학교 방송국에 들어갔다. 인원이 많지 않았기에 우리는 VJ라는 이름 아래 기획, 촬영, 아나운싱, 편집, 음향 등 전부를 다 맡아서 해야 했다. 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학교 방송국들은 전통을 운운하며 삼엄한 분위기를 고집한다. 선배한테 깍듯하게 인사를 해야 하고, 1분이라도 지각을 하면 사유서라며 A4 용지에 깜지를 제출해내야 하고, 만들어온 영상에 대해 무시무시한 피드백과 협박(?)들을 들으며 재수정을 해야 했다. 일도 너무 많고 또 잘못하면 안 되었기에 대학 시절 내 대부분의 역량과 에너지를 방송국 활동에 쏟았다. 전공과목들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수업 시간이 내 쉬는 시간이 되어줄 정도로..). 내 신경은 온통 기한 내 기획안을 제출하고, 대본을 쓰고,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해서 선배들에게 마스터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우선 동기들과 어떤 영상을 만들까 서로 머리를 싸매고 아이디어를 냈다. 기획안이 픽스되면 필요한 인물들을 컨텍하고 촬영 계획을 잡았다. 본격적으로 카메라와 트라이 팟을 들고 서울 곳곳의 모습과 수많은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학교로 돌아와서 편집을 하고 무수한 피드백을 받고 수정 또 수정.


일을 마치지 못해서 방송실 바닥이나 책상에 돗자리를 펴놓고 동기들과 잘 때도 많았다. 찬란한 20대 초반의 시기. 남들은 예쁘게 자신을 꾸미고, 미팅을 하며 시간을 채워나가는데, 나는 언제나 후줄근한 차림에 다크서클로 메이크업을 하며 던전 같은 방송실 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바쁘게 살았다. 왜 이리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동기들과 울고 웃는 날들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서로 내뿜는 에너지와 풋풋한 열정이 가득한 그 분위기가 마냥 좋았다. 힘든 경험들이 많아질수록 내가 소속된 곳과 일에 대한 애정의 농도가 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자연스레 방송국 입사를 꿈꿨다. 거의 대학교 1, 2 학년 때부터 이 '꿈'은 윤곽을 드러냈고 나는 차근차근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 내가 구체적으로 뭘 하고 싶은지 생각했다. 분명한 건, 가고 싶은 곳이 방송국뿐이라는 것과 그리고 영상을 다루는 일이 좋다는 것이었다. 피디가 되기엔 내가 그리 크리에이티브하거나 박학다식하진 않기에 일단 패스. 그리고 지난날들을 생각해보면 나는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장비를 다루는 일이 좋았다. 가령 카메라로 촬영을 하거나 혹은 편집 소프트웨어로 영상 편집을 하는 방법을 배워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즉, '전문적'으로 무언가를 다룬다는 느낌 자체를 즐겼다. 그러나 촬영 감독을 준비하기엔 방송국 TO가 너무 적었다. 따라서 방송국에서 나름 뽑는 인원도 많아 될 가능성이 그나마 조금 높고, 전문적인 장비를 다루며 영상을 만드는 방송 엔지니어라는 꿈을 설정했다.


방송국 입사 그리고 방송 엔지니어.

이 단어들은 비록 다크서클을 밑에 달고 있을지 언정, 내가 열정 가득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학 시절을 가열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대학교 방송국 활동은 힘들었지만 분명히 내 꿈을 더 단단하고 선명하게 해 주었다. 물론 언제나 내 의지가 굳었던 것은 아니었다. 3학년이 되어 방송국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요건들을 본격적으로 찾아보았더니 이건 엄연히 엔지니어의 일로 공학 지식을 요구했다. 입사 시험을 보기 위해선 전자, 통신, 전기 공학 등의 분야를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했다. 눈 앞이 하얘졌다. 나는 그저 편집과 같은 영상 제작 일을 하고 싶은 건데. 나는 게다가 문과생이었기에 미적분도 배워본 적이 없었다. 또한 어떻게든 입사를 한다고 쳤을 때, 방송 엔지니어의 일은 굉장히 범위가 넓어서 단순히 제작 기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심 없는 송신, 송출, 네트워크 이런 일들을 맡을 수도 있을 텐데. 그래도 이 모험을 해봐야 하나라는 고민에 휩싸였다.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래도 방송국 빼고 정말 관심 가는 곳이 없었기에 결국 입사 준비를 해보기로 했다. 우선 학교에서 IT 공학 분야로 복수 전공을 했고, 입사에 가산점을 받기 위해 관련 자격증 공부를 했다. 또한 다행히도 입사 준비를 도와줄 학원을 찾아 그곳의 수업을 들으며 차근차근 엔지니어가 될 준비를 했다.


공부를 하면서 말 그대로 현타가 자주 왔다. 이십몇 년 동안 그저 문과생이었던 내 눈 앞엔 살면서 듣지 보지도 못한 생소한 공부 거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학원 수업을 들을 땐 절대 강의를 한번 듣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하는 말을 모조리 다 적었다. 그리고 같은 강의를 세 번 정도 듣게 되면 정말 신기하게도 하나씩 이해가 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공부들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같이 공부한 스터디원들과 신세 한탄도 하고 서로 의지하며 소소한 재미를 찾으려 했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내 꿈에 가까워진다는 기분은 나를 설레게 해 주었고 삶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학교 수업 수강, 복수 전공 졸업 작품 준비, 공학 공부, 자격증 취득 외에도 나는 부지런히 봉사 동아리, 독립 문화 축제 서포터스, IT 창업 동아리 활동 등 정말 다양한 활동들을 병행했다. 빨리 꿈을 이루고 싶었기에 휴학 한번 하지 않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 열람실에서 내 할 일 들에 매진했다. 친구들은 휴학하고 유명 회사에서 인턴을 하거나 교환 학생을 가면서 스펙을 쌓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교정 벤치에 앉아 삼천 원짜리 밥버거로 끼니를 때우면서 괜스레 불안해질 때도 많았다.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무턱대로 진로를 정한 게 아닐까?', '내가 기대한 일이 아니면 어떡하지?', '아니, 그보다 내가 방송국에 못 들어가면 어떡하지?'이라는 걱정들이 엄습해 올 때도 있었다. 가끔은 괜스레 그냥 이 길을 접고 내가 복수 전공하는 IT 분야의 대학원을 가는 건 어떨까 하며 대학원 커리큘럼들을 찾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나 많은 고민과 방황 끝에 결론이 났다. 그 무렵 읽었던 책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사람이 꿈을 이루지 못하면 평생 그 꿈에서 얼쩡거리는 망령이 된다고. 또한 나중에 내가 자식을 낳았을 때 적어도 내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되기 싫었다. '엄마는 꿈이 있었단다, 방송국에서 일해보는 꿈'.


그냥 계속 도전해 보기로 했다.

여러 걱정되는 요소들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안 하면 분명 후회할 거라 판단했다. 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방황 끝에 내린 결론은 좀 더 내 결심을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학교 공부나 교외 활동들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학원에서 입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 돼서 너무 빨리 입사 공고가 떠버렸다. '난 아직 공부할게 너무 많은데, 큰일이다. 입사 공고가 자주 나는 것도 아닌데'라는 걱정을 했지만 일단 그냥 경험 삼아 지원해봤다. 그렇게 14년도 겨울에 나는 처음 회사라는 곳에 지원을 했고, 정말 기대 안 했던 지원이었는데 한 단계 한 단계씩 운이 좋게 통과를 했다. 서류 전형, 필기시험, 두 번의 면접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생의 첫 입사 지원에서 한 번에 성공했다. 오래전부터 갈망했던 일이었기에 정말 행복했다. 꿈을 꾸고, 목표를 세우고, 열정을 쏟고, 몰입을 했다. 그리고 결국 원하던 것을 해냈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 생에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입사 합격 소식을 듣고 연수를 받던 첫 한 달까지의 기간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달콤했던 기간이었다. (이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이후에...)


고등학생 시절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발을 들인 방송의 세계였다.

이제 이 영역의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벅찬 기대를 안고서,

생에 가장 설레고 화창한 25살의 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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