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은 적이자 어느 날은 희망이 되어주는.
영어.
하면 단전에서부터 솟구치는 설움이 밀려와 뭐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다.
28살까지 나는 해외여행은 물론 수도 없이 다녀봤지만 해외에서 살아본 경험은 없었다. 한국의 여느 직장인들처럼 영어 공부는 매년 1월 1일 새해 계획을 세울 때 반짝 등장하는, 막연히 '하긴 해야지..' 하는 영역일 뿐이었다. 사실 못해도 사는 데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수능 공부를 할 때에도 이렇게 영어가 절실해지거나 정말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유학을 준비하면서부터 영어와의 싸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준비는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토플 학원 주말반을 다니면서 틈틈이 공부를 하였지만 회사 생활과 병행하는 건 역시 쉽지 않았다. 영어에 손을 놓은 지 오래돼서 토플은 너무나 넘기 어려운 산이었다. 또한 야근, 새벽 근무, 주말 출근을 밥먹듯이 하는 나에게 물리적으로 공부할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다. 그. 런. 데. 직장인으로서 토플 공부에 하루 종일 올인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생겼다. 바로 회사의 장기간 파업이었다. 그렇게 오래 할지 몰랐는데 결국 회사는 5개월에 가까운 파업을 했고(아마 역대 최장 기간이 아닐까.) 덕분에 나는 몇 개월 동안 여느 유학 준비생처럼 토플 공부에 내 한 몸을 다 바칠 수 있었다. 회사 일도 안 하는데 사람들은 왜 바쁜 거냐며, 요즘 대체 뭐하냐며 궁금해했다. 토플 공부는 말 그대로 토. 나. 오. 는. 공부였지만 나는 내색할 수 없었고 속으로 힘듦을 삭여야 했다. 그렇게 두 번의 시험을 보고 어느 정도 원하는 성적을 만들었다. 내가 지원하는 예술 학교 석사 과정은 GRE 성적은 따로 요구하진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토플 성적, 포트폴리오, 자기소개서 그리고 학업계획서 등을 부랴부랴 준비하고 본격적으로 생각하는 학교에 지원을 했다.
토플을 마치면 일단 큰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는 데 결론적으로 그건 출발점도 되지 못한 일이었다. 수능과 토플 같은 전형적인 시험 영어만 겪어온 내가, 미국에 가서 따로 어학 과정을 밟지 않고 석사 전공 수업을 듣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2018년 9월. 첫 수업이 시작되는 날,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풀로 세 과목의 수업을 들었다. 그중 첫 번째 수업에선 내가 그동안 해온 일과 연관되고 관심 있는 내용을 다뤘기에 '흠, 생각보다 할 만 한데?'라고 안도를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수업부터 그러한 안일함은 산산이 무너졌다. 멋있게 턱수염을 기르신 중년의 교수님이 들어오시자마자 첫 질문을 모두에게 던졌다. "What are you into?". 아니 대체 내가 모르는 단어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저게 무슨 말이지 싶었다. 다들 저마다 답을 하고 심지어 나는 맨 마지막 차례이었기에 남들의 답을 듣고 대충 질문의 뜻을 짐작해도 되었으렸만. 언어적 능력과 센스가 본래부터 비루한 나로선 도저히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고, 내 차례가 왔을 때 결국 질문이 무엇이었냐고 되물었다. 교수님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what. are. you. into.라고 아주 또박또박 천천히 대답해주셨다(이러한 차가운 첫인상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이 교수님이 불편한 건 트루다). 바로 이 순간부터 나의 영어로 인한 고난과 역경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하필 수업 방식도 인원 8명이 원형으로 앉아 대화하는 소규모 토론식이었다. 수업 참여는커녕 말 그대로 교수님과 학생들의 말들을 2,30 퍼센트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정말 생에 처음 느껴보는, 나의 무능함에 직면하는 순간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거의 울기 직전의 상태로) 교수님한테 가서 사실 30프로도 못 알아듣겠다, 지금이라도 전공 수업 대신에 ESL(영어 학습 과정)을 신청해야 할까라고 질문을 했는데 교수님은 그건 네가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친절히 대답해주셨다. 그리고 정말 고민했다. 이제 와서 전공 수업을 다 취소하고 ESL부터 들으면 추가로 돈도 훨씬 많이 들어갈 것이고, 내 유학 기간도 더 늘어날 텐데, 그렇다고 이 비루한 영어 실력으로 전공, 그것도 석사 수업을 어떻게 듣겠나 싶었다. 학교 어드바이저와 부모님이랑도 얘기를 많이 했지만 결국은 좀 더 버텨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부딪혀보자. 분명히 이번 첫 학기는 개고생 하겠지만 버티면 영어가 많이 늘 거다!라고 스스로 세뇌하고 위로를 건네며 꾸역꾸역 들어보기로 했다.(슬프게도 이 첫 학기를 듣는다고 해서 귀가 뚫리거나 영어가 확 느는 일 따윈 없었다.) 이 당시 수업만 끝나면 빠져나간 혼을 간신히 붙잡으며 정처 없이 동네를 거닐었다고 한다.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없고, 대화가 무슨 내용으로 진행되는지 이해를 못하고, 이 대화 속에 혹여나 나에게 급작스런 질문이 있을까 봐 매 순간 노심초사해야 했다. 한국에서 대학 잘 나오고 나름대로 좋은 직장에 다니며 인정받고 살 수도 있던 나였는데.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좌절감, 무력감과 소외감이었다. 아무리 한국에서 힘든 일들을 겪었어도 사실 집에 가서 가족들한테 하소연하고,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면 그만이었다. 여기에서 느낀 힘든 점을 한국의 지인들에게 말해봤자, '네가 기어코 선택한 일이잖아, 그러길래 왜 갔어' 혹은 '그래도 유학이라니 너무 멋있고 부러워'라는 와 닿지 않는 답변들만 돌아올 뿐이었다. 당시 나의 힘듦을 들어주는 곳은 정말이지 없었다. 나는 영어를 빨리 늘리고 싶었기에 한국인들과도 최대한 어울리지 않으려 했다. 기숙사에 같이 살던 미국, 인도, 중국 출신들의 친구들과 어울렸고 다들 착했다. 그러나 나의 영어 실력으론 깊이 있는 대화는 역부족이었다. 험준한 언어의 장벽 속에 막혀 나 혼자 세상에 덩그러니 있는 기분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학교 생활과 환경에 적응도 하고, 같은 처지의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며 서로 의지하며 나름 잘 지내왔다. 물론 수도 없이 영어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다. 영어는 생각보다 빨리 늘지 않았고 여전히 수업 시간에 내 의견을 말하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항상 수업 가기 전에 실라버스를 보고 '아 오늘 이런 걸 배우겠네, 그럼 그 내용에 대해 딱 한 마디만 하고 오자'하며 의지를 다졌지만 실패할 때가 태반이었다. 사실 이 어려움은 단순히 언어 사용의 어려움에서만 온다기보다 내 소심한 성격도 한몫을 했다. 다른 유학생들을 보면 다들 잘 적응하고 재밌게 잘만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힘에 부칠까 하는 순간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말 못 하는 벙어리 신세인 내가 그나마 여기서 인정받을 수 있던 건, 한국에서의 커리어와 경험들이었다. 내가 했던 일이 현재 미국 산업에서도 한창 뜨는 일이고, 그렇기에 나와 같이 작업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영어를 못해도 경험과 나만이 할 수 있는 무기가 있었기에 그나마 나의 자존심과 자존감이 좀 덜 무너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일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 덕분에 수업과 과제 외에도 나는 꽤 많은 학생 작품들에 참여하며 정말 바쁘게 살았다. 유학생 하면 현지인들과 맨날 홈파티를 벌이며 딩가딩가 하는 이미지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범생이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작업에 쏟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놀면서 영어를 늘리기보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과 작업을 하면서 영어를 쓸 일이 많았다.
솔직히 아직도 유학 2년 차라고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아직도 수업 시간에 한마디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친구들한테나 교수님들한테 문자 하나, 메일 하나 보낼 때에도 틀린 건 없는지 맞춤법 검사를 다 돌려보고 사전을 뒤져가며 연락한다. 영어는 기대보다 늘지 않았지만 '이건 그저 나한테 제2 외국어일 뿐이야, 그래 나 못해, 어쩌라고?'라는 뻔뻔함이 늘었다. 어찌 되었건 초반보다 심적 안정감이 생겼다면 다행이지 않나 싶다.
이렇게 지긋지긋한 영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더 커져만 간다. 절실하게 잘하고 싶다. 영어는 분명 앞으로의 삶의 영역과 내 시야를 넓혀 줄 수 있는 막강한 도구가 될 것 임에 틀림없다 것을 직감한다. 또한 이 경험 속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이젠 내 무능함에 직면하는 일이 그렇게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마냥 좌절할 것이 아니라, 발전과 성장의 기회라고 여기려 한다. 내가 못하는 영역을 마주할 때 처음엔 분명히 자존심도 상하고 힘든 게 당연하다. 그러나 한번 도전해보자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이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이 과정 자체가 은근 재미도 있다. 잘하는 것만 하고 살면 인생이 따분하지 않을까? 아직은 좀 더 내가 못하는 것에 도전해 볼 때이다. 아니, 평생 이렇게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면 삶에 더 활기가 돌 것이라고 확신한다.
요즘은 졸업 작품이고 수업이고 뭐고, 무조건 영어가 우선이다, 영어라도 늘려서 돌아가자라는 생각이라서 꽤 많은 시간을 영어에 투자한다. 딕테이션, 섀도잉, 리스닝, 스피킹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공부를 하는 중이다. 남은 6개월이라도 이렇게 하면 더 늘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계속 제자리인 것 같아 허무하지만 그래도 무던하게 이 제자리걸음을 하다 보면 분명 지금보다 한 계단 더 올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해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