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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슈타르솔 Feb 19. 2023

2023-02-17금요일

아무리생강캐도 난

 몇 년 전에 봤을 때도 그 아이는 씩씩했었다.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고 번듯한 학력이나 집안 배경 따위는 없었어도 늘 밝고 당당해보여서 멋있었다. 오늘은 본인이 공부하던 시험의 국가자격증 시험이 있는 날이라 해서 만나고 왔다. 시험은 어찌어찌 잘 치루었다. 낯선 이들로 가득찬 정오의 시험장 분위기는 예비군훈련장의 것과 같이 느슨하면서도 숨길 수 없는 예리한 긴장감 같은 것이 공기 중에 거칠거칠하게 섞여서 이따금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합격을 기원합니다" 무미건조하게 쓰여진 한 마디가 싸구려 플라스틱제 박스함에 쓰여져 좌중을 지켜보고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가 준비한 것들을 가지고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수 주에서 몇 달동안 준비한 것들을 수 시간에 걸쳐서 쏟아내었다. 타이머가 울릴 때마다 간담이 서늘했고 그 중에는 더러 시험 도구를 떨어트리는 등 실수를 하는 사람도 나왔다. 절대평가라서 그런지 내가 응원하는 친구 외에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치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시험을 잘 치른 녀석이 고기를 사줬다. 무한리필 돼지갈비집이었다. 뜨겁게 솟아오르는 숯불의 화력에 몸도 마음도 노곤해지는 기분이 들려한다. 너무 긴장을 했었는지, 몸살 기운이 있다며 오늘 코가 삐뚤어지도록 같이 마셔준다 하던 녀석은 맛있는 식사와 가벼운 반주만 나눈 채 집으로 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마시는 감기약이랑 숙취해소제를 건네준 채 버스에 오를 때까지 배웅해주는 것뿐.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는 듯 하다.


길 위에서 오랜 만에 전에 알던 형들을 마주했다. 너무 반가워서 살짝 취기가 오른 난 사람으로 북적이는 거리에서 둘을 연달아 껴안아주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은 곧이어 술자리로 이어졌다. 밤이 깊어갈수록 누구에게는 함부로 말 못할 집안사정이나 그간의 이야기들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술술 풀려나왔다. 나는 '어찌해서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았는가'를 그들에게 설명하면서 나보다 인생을 오래 산 형님들의 지혜와 조언을 구했다. 그러면서도 술은 맛있게 술술 들어간다. 아버지처럼 나도 알콜중독자가 되어가는 건가? 술이 달면 위험하다는데 나는 일부러 외줄타기를 하듯 달고 독한 술만 골라 마셨다. 'I'm totally gonna be wasted' 되도 않는 영어로 있는 체를 하며 형들 앞에서 깝죽거린다. 오랜만에 양주도 얻어마셔본다. 마트에선 5만원 짜리가 바에서는 16만원이 된다. 와... 이렇게 인생 초보자는 오늘도 경험치를 터득한다. 


 한 형의 미국 NASA 스카웃 썰을 들으면서 생각해보았다. 그 형이 B를 데려가기에 앞서 결단을 요구하거나 헤어짐을 고민하는 이유는 애인이 나와의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것을 포기한 것과 연관성이 있어 보였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경제적 독립성을 확보했냐 하는 것> 이라는 이야기도 가슴에 깊게 와 닿았다. 결국은 그것이다. 나는 과하게 의존했고, 성인 대 성인의 만남에서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관계의 촛불은 예상보다 더 빠르게 연소돼 버렸고, 본인을 희생해가며 불을 밝히기에는 돌봐야할 것들이 너무 많았던 그 사람은 관계의 불을 끄는 악당이 되기로 결심한 듯 싶다. 


 오늘은 무슨 운수가 들었는지 한 번만 더 술독에 빠져보자 마음먹고 이번 달 생활비가 간당간당한 데도 술집을 갔으나, 보는 이들마다 나에게 '불쌍타'하며 술과 밥을 사주었다. 미안한 마음에 집 가는 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몇 만원 어치 이온음료와 과자, 라면 등을 사다가 면죄부인양 쾌척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한쪽으로 쏠린 스프링 나간 침대에 누워 아침이 되도록 하반신이 아파 쉬이 "잠에 들지 못했고" 일어나자마자 눈이 너무 고통스럽게 부셔서 고생했다. (다시는 그 형 집에 가지 않으리). 


 외로우면 사람이 빨리 늙는다던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외로움만이 사람을 성장시킨다고들 한다. 

애인에게 가졌던 미안함과 그립고 처연했던 나의 마음은 어느새 붉은 노기를 띄고 원망의 싹을 틔워가고 있는 중이다.

가볍고 하찮은 관계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낡아져버렸고

처연하고 고고히 외로움의 물결을 타고 나아가기에는 정신이 미약하고 담대치 못하다


Adobe stock

어쩌겠는가 걸어야지

걷고 뛰고 땀흘리고 눈물도 흘려야지

걷다 아프면 잠시 앉아서 쉬면서 가고 

주변인들에게는 높아서 올려다보기가 버거웠던 기대의 벽을 허물어 버릴 거다.

조용히 무덤덤한 눈으로 최소한의 애정어린 관심을 보내줄 테다.

모두가 자신만의 '트레드밀' 위를 가쁘게 걸어가고 있는 실정이니 아무도 그 사람의 인생을 뭐라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땅의 사회는 너무나 냉혹하고 무관심해서 낙오된 이들을 일으켜 세워주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열심히 걷고 또 걷는가보다.



1.집안일(살림=나를 돌보는 일. 나를 '살림') 하기 : 밀린 방청소, 빨래하고 널기, 바닥 쓸기&닦기


2.운동하기(스트레칭, 발 아치 살리는 동작, 푸시업, 철봉매달리기, 자전거 20분 이상 타기)


3.야채랑 물 많이 먹기


4.사람 많은 곳 가기


5.교보문고 가서 책 주문한 것 찾아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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