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 어른 같았어
술을 마신 건 금요일 밤인데, 토요일과 일요일 낮이 몽땅 날아갔다. 잘 자란 대방어 마냥 기름 좔좔 통통해진 복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다이어트의 거시적 관점에서 나는 세 발자국 정도 퇴보했다.
어제까지는 눈이 떠지지 않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눈이 떠진다. 의식적으로 야채랑 물을 잔뜩 잔뜩 섭취한다. 2리터짜리 생수통이 금방 바닥이 난다. 편의점에서 사 온 씻어 나온 방울토마토도 옴뇸뇸 깨물어 씹어준다.
시디 신 과즙이 톡 하고 터지니 입안이 쓰리다. 피곤해서 그런지 입가에 뭐가 났다.
그래 난 지금 좀 우울한 것 같아
책과 사람들과 미디어가 나에게 조언했었다.
'우울할 때는 혼자 방 안에 있지 말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라'고
평소에는 사람이 많은 곳을 정말 싫어한다.
사람이 모이면 응당 갈등이 생기고, 그 부조화들이 찌그락 째그락 마찰을 일으킬 때 나는 소리가 나는 버겁다.
몇몇 어른들은 그게 바로 사람 사는 맛이 아니냐면서,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자유로이 오고 가던 옛날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오늘날 젊은이들은 그걸 '침범'이라 부른다).
나는 나의 영역이 소중한 만큼 당신의 영역을 존중한다.
"그러니 그쪽도 부디 내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 주시길" 바라고 또 바라며 매너 있는 소시민의 삶을 지향한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간다. 집에서 나선 지 20여분 만에, 개인의 영역을 존중하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은 넝마가 되고 만다. 멀리서부터 온갖 '목소리'들이 전자 확성기를 타고 내 고막을 강타한다.
그들은 나의 영역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가?
단상에 선 생물들이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새벽녘 단잠을 깨우는 발정난 들고양이만도 못한 인간들이 감히 나의 영역을 침범하고 내 사고와 인지를 흩트려 놓는다.
부정적 마음을 알아차리자 셀프 도닥도닥을 하면서 오랜만에 들른 교보문고의 입구에 들어선 순간 나는 또 그 사람을 떠올린다.작년 말 크리스마스 때 이곳을 같이 왔었지.
걷는 걸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날 위해서라면 지하철 한 정거장씩이나 걸어주었다.
('10보 이상 택시'가 그 사람의 좌우명이었다)
책을 두어 권 사들고 나서니 해가 뉘엿뉘엿했다. 새벽빛처럼 하늘이 우울하게 식어간다.
거리에 커플이 너무... 많다
청계천을 오랜만에 걸었다.
나는 걷는 게 너무 좋다
다음 애인은 유산소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같이 손잡고 걸으면서 보이는 풍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바위에 부서져내리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빌딩 꼭대기에 선 듯이 조경석 위에 멀뚱이 서서 잠시 바라본다.
일본에 갔더니 물결을 형상화한 모래 예술 유명한 머시기가 있었는데...
나는 교양 있는 체 거들먹거리기엔 너무 게으른 것 같다
예전엔 혼자 있는 시간에 어쩔 줄 모르고 타인에게 기댔는데,
이제는 혼자여도 제법 괜찮은 것 같다
나 좀 어른이 된 것 같다(아님 늙은 걸지도)
집에 돌아가는 열차에 오르니 팔천 보 가량을 걸었다고 앱이 말해줬다.
소모한 열량은 얼마 안 됐겠지
하지만 부정적 감정은 확실히 잔뜩 태워낸 것 같다.
이래서 나는 걷기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