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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선비 May 28. 2024

상처의 반전

청어람글쓰기 과제 

곧 여름이 온다. 아이들은 미리 수영복을 꺼내며 여름이 오면 바다에 자주 가겠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긴 옷을 다른 옷장에 넣고 여름옷을 꺼내어 정리한다. 나에게는 상처의 계절이었던 여름이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와 더불어 이제는 여느 계절처럼 똑같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여름이 오는 게 싫어서 온몸으로 막아서곤 했다. 나의 노력을 비웃듯이 여름은 어김없이 왔고 나는 여름 내내 상처를 뒤집어쓰고 우울하게 보냈다. 한참 동안 여름이 싫었고 상처로 아파했다. 어느 순간 새살이 돋고 딱지가 떨어져 나갔다. 여름은 하나의 계절일 뿐이고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라는 것. 조금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시간이 충분히 흘러야 온전히 깨닫는 순간이 오는 게 아닐까.


처음부터 여름이 싫었다. 장마와 폭염의 나날들. 그런 날에는 아버지가 집에 자주 계셨고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러니까 장마와 폭염에 쉬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아빠가 싫었던 것이고 우리를 위해 고생하시는 아빠를 싫어하는 내가 나쁜 아이인 것 같아 나 자신이 싫었다. 여름은 나를 미워하게 만들어서 싫었고 그 자체가 상처였다.


초등학교 1학년 비가 오는 어느 날, 학교 마치고 집에 가니 아빠가 와 계셨다. 술에 취한 채 텔레비전을 보시는 아빠 등 뒤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만화를 못 봐서 울화통을 터트렸다. 왜 비 오는 날에 아빠는 일을 나가지 못할까. 새벽에 집을 나섰다가도 비가 오면 아빠는 왜 집에 올까.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 말하지 못했다.


장마가 계속되던 날,  큰 상에 책을 펼치고 동생들과 숙제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술 취한 목소리로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며 책을 큰 소리로 읽으라고 하셨다. 아빠가 직접 교과서를 가져다 읽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나는 그때 생애 처음 큰 충격에 휩싸였다. 아빠 목소리에서 나오는 문장은 책의 글과 달랐다. 아빠는 글자를 몰랐다.


우리 집 큰 달력 숫자 밑에는 동그라미와 엑스표가 그려져 있었다. 동그라미가 많으면 아빠에게서 콧노래 소리가 들렸고 엑스표가 많으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여름에는 한숨 소리가 유독 많았다. 장마뿐만 아니라 폭염에도 일하러 나가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를 보지 못하는 날도 길어졌다.


아빠가 볼펜으로 쓴 것들은 동그라미와 엑스, 30일 중에 며칠 일했는지 표기했던 숫자,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전부였다. 삐뚤빼뚤, 엉성하고 불완전하고 불안한 느낌. 잘못 딛으면 하염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그러다 결국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아빠가 쓴 모양들은 내가 안정적으로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곳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빠의 직업이 회사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불만스럽고 불안정했지만 그렇다고 아빠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생 때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가리키며 귓속말로 했던 말과 표정은 지금도 내 뇌리 속에 박혀 있다.  "제 아빠는 막노동꾼이야." 심한 말을 한 건 아닌데 눈을 흘기며 벌레 보듯 말하는 친구의 표정에서 나는 극도의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그 친구와 똑같이 반응하지 않으면 내 아버지의 직업이 막노동자라는 것을 들킬까 봐 나도 애써 표정을 일그러트려야 했다. 뜨거운 여름날 내 몸이 더 뜨거워졌고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땅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상처를 덜 받기 위해 나는 현실을 외면했다. 매년 초 작성해야 했던 가족인적사항을 적는 가정통신문에 나는 엄마 아빠 모두 “회사원, 고졸”이라고 적었다. 친한 친구에게조차 우리 집과 엄마아빠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가족이라는 존재를 내 의식 속에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하면 그만큼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고통은 더 크기 마련인 걸까. 고등학교 2학년 초에 가정통신문을 발견한 엄마는 이런 건 솔직하게 써야 한다며 본인이 스스로 작성하셨다. 아빠 직업란에 건축 잡부, 학력란에는 학교 다닌 적 없음, 엄마 직업란에는 공장, 학력란에는 국졸. 수치심이 몰려왔고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서류 덕분에 나는 장학생이 되어 장학금을 받았다. 담임선생님이 부모님의 형편과 3남매 중 장녀에다 성적도 괜찮아서 나를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셨다. 꽤 큰 금액을 받았고 공부를 잘해서 받은 것으로 와전되어 친척들에게 칭찬도 많이 들었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다만,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엄마는 한글도 알고 한자로 자기 이름을 쓸 수 있으며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도 아빠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학력이 최고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무학력자에 글도 모르는 부모님을 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확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니지만 여전히 불행하다고 느꼈고 아빠의 직업을 부끄러워했으며 동시에 죄의식에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 큰 고비는 결혼할 때였다. 나는 남편에게 한 번도 아빠 이야기를 해 본 적 없었지만 남편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아빠의 직업을 부끄러워하고 있고 무슨 직업인지 꺼내는 것조차 싫어한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남편은 아빠에 대해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평생 농부로 노동자로 살아온 자신의 어머니를 인정했던 것처럼 나의 아빠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시댁 식구들은 (뒤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앞에서 아빠의 직업이나 형편을 두고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언젠가 남동생이 아빠가 하셨던 말을 전해주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혹시 누나가 시댁에서 구박받을까 봐 걱정이 된다고.


나는 상처를 꼭꼭 숨겼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죄의식 모두 까발리듯 드러났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아빠의 직업이 막노동자라는 것 말고는 아빠에게 상처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빠는 월급을 받으면 모두 가족에게 헌납했다. 엄마와 자식이 최우선이었고 스스로 가장 낮은 사람처럼 살았다.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는데 딸인 나는 그 일자리 자체가 상처였고 못 배우고 똑똑하지 않다고 아빠를 몰아세웠다. 내가 상처받은 게 아니라 내가 아빠에게 상처를 준 게 아닌가.


어이없는 반전 앞에 또 한 번 죄책감에 시달리는 시간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쌓아 올린 상처의 서사는 몸속 깊이 박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아빠를 생각하면 옅은 수준의 수치심이 밀려올 때도 있다. 나의 미성숙함을 원망하기도 하고, 직업에 귀천을 두는 사회적 분위기를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 이상 아프고 고통스러운 상처로 여기지는 않는다. 여름이 오면 장마와 폭염 때 일을 쉬었던 아빠의 모습을 추억처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를 제외하고 매일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일을 해야 했던 아빠에게 부끄러움이 아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손주손녀들과 같이 바다에 가자고 연락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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