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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한수 Nov 22. 2020

퇴사, 그리고 예상 밖의 입사

몸과 마음에 많은 생채기를 남기고 8킬로가 빠진 몸으로 주말 이틀을 쉬고 새로운 곳에 입사했다. 본래 다니던 곳을 그만두겠다고 생각을 하고 몇 군데 원서를 넣었는데 어떤 곳은 서류도 통과하지 못했고, 어떤 곳은 면접을 보고 기대를 했는데 떨어졌다. 그러다가 붙은 곳은 면접을 보면서 절대로 나를 뽑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퇴사 준비를 하면서는 이곳에서 일할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누가 보면, 그렇게 준비 없이, 들어갈 직장도 없이 퇴사를 결정했냐, 무모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름 직전에 시간강사로 나가던 학교에서 계절학기 수업을 하면서 두어 달을 버티고 일단 쉬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급하게 입사를 하는 바람에 강의는 다른 분에게 부탁해서 넘겼고, 나는 마치 퇴사를 겪지 않은 사람처럼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고 곧바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입사한 곳이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다. 어떤 사람들을 들어오고 싶어서 어떻게든 애를 쓰는 곳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가고 싶지만 또 차마 나가지는 못하고 다니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입사 2년이 지난 후, 나는 점점 그 후자에 들어가고 있다.


최근 귀국한지 만 3년을 찍으면서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는데, 나는 이곳에서도 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일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겸직도 가능할 것 같았고, 논문을 쓰거나 강의하러 다니면서 내가 가진 능력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미국에서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던 탓인지).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한국에서 어떤 기관에 속해 일한다는 것은 그런 자유를 반납하고 묘한 “충성”을 표시하면서 일하는 것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겸직은 거의 원천 봉쇄되어 있는 느낌이었는데- 그런 상황을 잘 모르고 조금은 나이브한 상태로 한 학교에 개설한 강의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서 정말 비굴할 정도로 납작 엎드렸다. 인사부서가 원하는 조건을 다 만들어서 가지고 가야 했기에, 학교에 사정하여 시간을 바꾸는 등의 정정을 한 뒤, 겨우 승인을 받았고, 학교와 학과에 민폐를 끼치는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사부서 담당자에게 마치 돈벌이라도 하러 나가는 딴짓하는 직원으로 취급받았고, 자존심은 무슨 다 녹은 버터처럼 그곳 바닥을 흘러내렸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 강의는 나에게 큰 활력소가 되었다. 오랜만에 여러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을 만나고, 내가 하는 일과 또 내가 받은 학위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지식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귀한 기회였다. 물론 그것도 이제는 더 철저하게 봉쇄되어 다시는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일은 생각보다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입사한 날과 입사 직후, 부서에서 상사 두 분이 각각 나를 따로 불러서 “우리는 당신을 원하지 않았는데 최종면접을 본 사람들이 당신의 0000를 좋게보는 바람에 당신을 뽑았다”는 말을 꽤나 점잖게(?) 말해줬는데, 그래서 몇 달은 (어쩌면 지금도 조금은) 찌그러진 기분으로 일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나를 “원하지 않은 이유(너는 박사학위 밖에 없고 경험이 부족하다) 때문에 다들 박사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을 없애려고 꽤나 애를 많이 썼던 것 같다. 문서작업이나 행정처리, 예산업무, 그리고 다른 부서와의 협조 등을 정말 남에게 미루지 않으려고 노력했고(덕분에 뭔가 떠안게 된 면도 없지는 않지만) 이제는 같은 부서에 없는 앞의 그 두 상사가 보기에 조금은 달라 보이지 않을까, 내심 생각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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