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한수 Nov 27. 2020

남을 나무라지 않을 수 있는 여유

여유도 인격의 요소가 아닐까

이제 한 달이 지나면 회사원 생활을 시작한 지 만 2년이 된다. 원래는 홀로 논문만 쓰고 연구만 하던 사람이 30대 후반이 다 되어서 회사라는 곳에 들어왔고, 그것도 예산부터 결산까지 다 맡아야 하는 특수한 자리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닥치는 대로 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당장을 기준으로 말하면 정말 어마무시하게 최악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설명하자면 복잡하지만, 상사도 동료도 다 좋고, 직장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물론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발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일의 구조상 외부에서 들어오는 갑질과 압박이 무시무시하다. 속된 말로 "갈아 넣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구나 싶을 정도로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사실 작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고, 올해의 특수한 상황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발현되는 이 현실은 뭐랄까, 결국 이 구조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이라 장기(?)적으로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설이 길었는데, 요지는 지금 상황은 상당히 부정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어차피 해야 하는 회사원 생활이라면, 언젠가 그만두기 전에는 긍정적인 부분도 잘 챙겨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은 너무나 부정적이어서, 시간을 조금 두고 이 나쁜 경험을 소화하고 싶고, 먼저 내가 무릎을 치면서 배웠던 점도 챙겨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작년 입사 초기, 본부장 급의 직속 이사님을 모시고 외국 손님들과의 자리에 배석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맡은 업무를 서서히 파악하던 시기라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갔던 것 같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워낙 상황을 잘 이해하고 전문성이 있었던 사람이라 웬만한 것은 다 알아서 하고 있었고, 사실 나는 머릿수를 맞추러 들어갔던 면이 더 컸다. 그런데 당시 우리 이사님도 입사(?) 초기 상태였던 분이라 (생각해보니 나는 한 3개월 차였다면, 이사님은 거의 2개월 차였던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알고 모르는지에 대해서 전혀 정보가 없는 상태였다. 설마 입사한 지 3개월밖에 안됐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 하셨을 듯하다.


회의가 중반쯤 흘러갔을 때 일이 벌어졌다. 이사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하시다가, "아 이건 여기 우리 00이 잘 설명할 수 있다"라고 나를 지목하시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그때 화제가 되었던 부분은 내 동료가 담당하던 부분이라 나는 정말 1도 모르는 사항이었다.


급습을 당한 느낌이었다.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아, 이건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이라 제 동료가 상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놀란 나머지, 정말 눈만 커다랗게 뜨고 얼음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능력도 출중하지만 순발력도 뛰어난 동료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대답을 했고, 대화는 무난하고 평화롭게 마무리될 수 있었는데... 한편,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고, 마음도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이사님의 성품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고, 초반부터 신입도 아닌 경력직으로 들어와서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것에 스트레스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로비까지 나가서 손님들을 배웅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이사님께 조심스럽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뭔가 변명 같고 구차했지만, "사실 그 부분은 제 담당이 아니라 아는 부분이 없다," "죄송하다" 등등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이사님은 해맑은 표정을 짓고 계셨다. 조금은 불편한 소리를 하시리라고 예상했는데 그런 표정으로 대뜸 하시는 말씀은 이랬다.


"누구라도 했으니, 됐어~"


회의 중에 있었던 실수 때문에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무엇인가가 순식간에 어이없이 뻥- 하고 날아가는 소리였다. 누구라도 하면 된다니. 일단 나를 나무라지 않는 이사님께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이건 뭔가 참으로 곱씹어볼 만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하면 된다.'


이후에도 이사님은 이런저런 단순한 행위로 뭔가 배움을 주셨다. 일례로 아주 간단한 것도 모르는 것에 대해 솔직 담백하게 물어보시는 것이 흥미로웠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건 뭐지?" "그거 다시 한번 설명해줄 수 있나?" 등으로 솔직하게 물어보실 때가 많았고, 또 어떤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이 뭔지 모를 때도 "그래서 내가 뭘 물어봐주면 될까?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적절하겠어?"라고 실무자가 원하는 결실을 최대한 존중해주실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누구라도 하면 된다,"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와 같은 이사님의 간단명료한 태도가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건 일면 맞는 해석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사님을 조금 더 지켜보니, 이건 일종의 여유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마음이 급하고, 어떻게든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쫓김이 있다면, 자칫 부하직원을 나무라고, 야단치고, 또 자기가 더 잘 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텐데. 사실 우리 이사님은 마음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유 속에서 모르는 것은 실무자를 통해 배우고, 원하는 그림이 안 나와도 괜찮고, 누구라도 대답하면 큰 문제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이사님께 여유의 철학을 배우고, 나도 기회가 되면 여유를 가지고 남을 대하는 인격을 길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어렵다. 그리고 지금은 다키스트 아워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탓하지 않을 여유(?)도 필요하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 그리고 예상 밖의 입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