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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l 17. 2024

낯선 길, 그보다 낯선 감정

길 위에서 내가 마주친 감정들

 어린 시절의 나는 감정이 무딘 아이였다.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본디 그렇게 태어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어느 모로 보나 둔한 편이었다. 아예 무감각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틀어 박혀 잘 나가지도 않았다. 잘 웃을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잘 울지도 않는 아이였다. 기분이 상하거나 어긋나면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돌아서서 혼자 다독이고 삭이는 편이었다. 어쩌다 기분 좋은 일이 생겨도 여기저기 조잘조잘 떠들어대기보다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가끔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곤 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속이 터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빤히 보면서도 입을 잘 열지 않았다. 그들은 불편해했지만 나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흠씬 두들겨 맞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일 정도였다. 그때 내 침묵을 상대해야 했던 분들께는 이제라도 깊은 유감을 전하고 싶다. 그땐 그저 표현에 서툴렀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지 모를 실수를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아찔한 시절을 용케도 별 탈 없이 건너온 셈이다).


 그 시절, 일상 그 자체가 무미하고 건조하다고만 느껴졌던 까닭은 나의 이런 성격적 결함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하나뿐인 아들이 학교 생활은 고사하고 취직은 제대로 할 수나 있을지, 설마 사회 부적응자가 되는 건 아닌지, 저러다 어쩌면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방바닥이 내려앉아라 한숨을 내쉬곤 했다.

 하얀 색 형광등 불빛을 바라보며 '내가 저 불빛을 파란색이라고 해도 너는 무조건 수긍해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정의했을 만큼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의 대처는 오히려 놀랄 만큼 파격이었다. 어머니처럼 한숨을 쉬는 대신 아버지는, 당신이 쓰던 낡은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36컷짜리 필름 한 통을 새로 끼워 넣은 카메라를 손에 쥐어 준 그는 나를 대문 밖으로 밀어냈다. 다 채우기 전까지는 집에 들어올 꿈도 꾸지 말라는 으름장과 함께. 운명은 참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십 수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그 필름 한 롤이 바꿔놓을 내 삶의 변곡점을 이때는 나도 아버지도 꿈에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시간은 멈추는 법 없이 정해진 할당량을 꼬박 채우며 흘러갔고, 나는 어느덧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었다. 집을 떠나 독립하긴 했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던 삶에서 회사와 집을 오가는 삶이 되었을 뿐이다. 모범생이라거나 성실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교를 떠난 후엔 엄마의 걱정이 어느 정도 현실화가 된 부분이 있기도 했다.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에 힘겨워했기 때문이다. 끈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너무 서툴렀다. 어렵고 귀찮은 일이었다. 주어진 일을 하는 동안 알아서 짜인 최소한의 그물망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관계를 확장시키기 위한 의지 같은 건 가져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 Switzerland.



 가끔 삶이 지루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던 순간에도 그저 ‘그런 팔자’라고 여겼을 뿐,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려고 굳이 애쓰거나 발버둥 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좋은 쪽으로든 그 반대로든 서른이 넘도록 이렇다 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지'하고 반추해 볼 만한 아주 작은 이야깃거리조차 우연히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럴 만한 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잊을 수 없을 만큼 기막힌 기억이나 강렬한 추억 따위는 말 그대로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다.


 신기하게도 때로는 그토록 지루하기만 한 나의 일상을 궁금해하고, 나눌 것 없는 삶을 어떻게든 나눠 가져 보려고 부단히도 애쓰던 사람이 잠시 곁을 지켰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의지를 갖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그저 알아서 ‘살아진’ 삶에 얹혀 보기만 한 사람은 의지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벅찬 상대였으리라. 기어코 지쳐 버렸는지 나에게서 떠나기로 했다며 그 사람이 말했다.


‘하루하루가 이벤트 같을 필요도 없고, 대단한 추억 같은 거 없어도 괜찮았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견딜 수 없는 건 그런 게 아니었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궁금해하지조차 않는 사람,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는데 설명해 줄 의지마저 없는 사람. 문제는 늘 거기에 있었어.’

 "그랬구나". 나는 그 짧은 대답 한마디로 그 사람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내려진 결론은 참으로 엉뚱한 것이었다. 나는 나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아니, 나를 한 번 떠나 보기로 했다. 나의 여행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조금씩 내가 그렇다고 여겼던 사람이 아닌 사람이 되어 갔다.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몸 속 어딘가에서 하나씩 허물을 벗고 깨어났고 그럴 때면 나는  다시 떠날 결심을 했다.


 나는 생각보다 뻔뻔하고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겁이 없는 데다 생각보다 인내심이 좋아 웬만한 건 거뜬히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과감하고 생각보다 참 여러 가지 표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눈물이 많고, 생각보다 잘 웃기도 하고 웃길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선뜻 먼저 다가설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들에게도 생각보다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람이었다.

“기사님 혹시 이태원 역 근처로 가나요?” 버스를 타기 전에 긴가민가할 때는 대범하게 물어볼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 여행은 새로운 세상을 찾으려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내 안의 새로운 감정을 깨우려 가는 여정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내가 가진 줄도 몰랐던 새로운 감정의 껍질을 벗겨내고 있다.



Poschiavo, Switz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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