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아름다운 작은 섬으로 떠나다 (2)
(지난 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항공권도 끊었겠다, 곧바로 숙소 물색에 들어갔다.
요론섬 관광 공식 사이트에 숙소나 관광 관련 정보들이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영화 <안경>에서 주인공이 묵었던 숙소도 숙소 명단에 있었다.
영화에서는 숙소 이름이 '하마다'였지만, 숙소 리스트에는 '요론토(요론섬) 빌리지'였다.
촬영 장소로 쓰인 곳은 요론토 빌리지 옆에 지금도 있지만, 숙소로 사용되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예약 링크를 들어가 보니 우리가 방문하기로 한 날에 예약이 가득 차 있는 것 아닌가.
일본에는 예약 문화가 잘 되어있는 것도 있었을 테지만, 우리가 워낙 일정을 급박하게 잡은 탓이기도 했으리라. 좌절하고 체념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요론으로 가게 된 이유가 <안경>이었는데, 반드시 숙소는 영화 속 그 장소로 잡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초조함이나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다. 아직10일 남짓 남았으니 그 안에 얼마든지 취소 자리가 날 수 있는 것 아닌가. 다른 숙소 예약을 잡아두고 기다려 보자고 말했다. 그런데 나보다 더 집념이 대단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나의 여자친구였다.
요론섬 관광 안내 사이트나 구글 등에서 검색해서 나오는 예약 사이트들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정보일 거다. 그럼 분명 일본인들만 아는 사이트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가설이었다. 그리고 30분 정도 지났을까, 그녀의 가설은 검증이 되었고 기적처럼 우리는 1박을 예약해 냈다.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여자친구를 보는데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요론에서 우리는 2박을 묵기로 했는데 그녀가 잡은 건 이튿날 1박이었다. 요론에서의 첫날밤은 여전히 노숙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다 다른 숙소 리스트들을 보다가 힌트를 얻었다. 어떤 곳은 요론토 빌리지처럼 예약 사이트들을 올려둔 곳이 있었지만, 어떤 곳은 사이트가 없이 전화로 예약을 해야 했다. 아찔한 아날로그 감성에 취할 듯했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AI 시대인데 번역기 돌리면 되겠거니 하는 마인드도 있었고, 일본 원어 버전으로 봤던 드래곤볼 덕분에 일본어가 친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뭔가 여자친구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장면을 보고 나니 어쩌면 이곳이 정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희망 회로를 돌리는 데에 일조했다.
OTO라고, 국제전화 무료 앱이 있다. 모든 국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대표적인 몇 곳은 무료로 국제전화를 걸 수 있다. 2012년에 마지막으로 썼던 기억이 있어서 찾아봤는데 아직도 있더라. 앱을 받아서 다음 날 요론섬의 대부분의 숙소에 전화를 돌려봤다.
숙소를 예약하는 한정된 상황의 전화이니 일어날 수 있는 대화의 시나리오가 몇 없다고 생각했다.
1) 일단 일본어를 못해서 그러는데 영어로 말해도 되느냐고, 일본어로 묻는다.
2) 된다면 땡큐다. 영어로 대화해서 예약 문의를 한다.
3) 안 된다면 당황하지 않고, 그러면 미숙하게나마 일본어로 하겠다고 한다.
4) 원하는 날짜로 방이 있느냐고 물어본다.
5) 있다면 하잇はい。없다면 이이에いいえ 또는 스미마센すみません
6) 그럼 나는 아리가또 고자이마스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를 외치고 상황종료.
2)번에서 대부분 해결되겠거니 싶었다. 요즘은 글로벌 시대 아닌가?
설령 3)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대로만 흘러가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론의 일본인들은 생각보다 영어를 잘 못했고, 생각보다 친절(?)했다.
일단 첫 타자로 요론토 빌리지에 전화를 걸었다.
모시모시 もしもし?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인간의 음성'이 들려온다. 일본말로 여보세요가 모시모시인 건 알았지만 그게 실제로 들려오는 순간을 내가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저 멀리 타국에 있는 사람의 음성이 이렇게 바로 귀 옆에서 들려온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아차,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지.
다행히 이분은 짧게나마 영어를 알아는 들으셔서 어찌어찌 통화는 잘 되었다. 비록 예약이 꽉 차 있다는 것만 다시금 확인했을 뿐이지만...(흑흑)
그래도 수확이 있다면 전날에 인터넷으로 예약한 건이 결제를 하지 않았는데도 예약이 확정됐다고 떠서 된 건가 싶었는데 예약이 됐다는 확인도 받을 수 있었다.
요론토 빌리지 말고도 웬만한 곳은 거의 다 전화를 걸어본 것 같다. 영어가 어려우신 분들이 훨씬 많아서 예상보다 커뮤니케이션에 난항이 일었다. 내가 하는 말은 파파고로 번역한 일본어라서 그들에게 어떻게든 닿겠지만, 반대로 그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을 수가 없으니 파파고로 번역이 어려웠다.
나는 어느새 '조또마떼 구다사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를 연신 외쳐대며 파파고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일본어로 바꿔서 로봇처럼 반복하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 '번역기 빌런'이 되어있었다. 상대방 말은 자꾸 대답을 안 하고(못하고) 계속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빌런도 이런 빌런이 또 없었다.
우당탕탕 전화로 난리부르스를 치는 게 끝이 났다. 노력에 비해 결과가 초라했다. 섬의 대부분의 숙소가 예약이 다 차있다는 비통한 사실만 확인하며 좌절했다. 그 과정에서 스미마센, 고멘나사이는 또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죄송하기는요, 갑작스레 닥쳐서 이상한 일본말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해댄 못난 외쿡인의 전화를 끊지 않고 받아주셔서 제가 감사할 따름인걸요..
정신을 차려보니 첫날은 숙소가 없고, 이튿날만 숙소가 있는 상황이었다. 이거 큰일이다 싶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구글에서 한 번 더 요론섬 숙소를 검색했다. 대부분이 내가 전화를 해본 곳이었다. 그러다 낯선 이름의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했는데 운 좋게도 방이 하나 있는 거 아닌가. 시설도 나름 깔끔했고 다다미가 있어서 일본 느낌도 낭낭했다. 이제 막 가오픈을 한 따끈따끈한 곳이어서 요론섬 관광 정보 사이트에는 없었나 보다.
일단 급한 대로 예약은 걸어놨다. 다행이었다. 노숙은 면했으니까. 다만, 저녁마다 숙소 주인장들이 숙박객들 간의 소통을 위해 주최(?)하는 작은 파티가 있는 곳이어서 다소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요론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별 수 있나, 그래도 노숙보단 파티가 낫지..응 아무렴..
이쯤 하면 만족할 법도 싶었지만, 어딘가 아쉬웠다. 이건 집념도, 집착도 아니었다. 뭔가 내 소지품을 두고 온 것 같은 찝찝함, 인연인 사람을 내가 무심결에 지나쳐버린 것만 같은 야리꾸리한 기분이 들어 뱃속이 간질간질거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되지도 않는 일본어를 남발한 통에 기가 다 빨렸지만,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요론토 빌리지에 다시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첫 통화 이후에 시간이 꽤 많이 지난 이후였다. 이번에도 안 되면 포기하고 플랜B로 예약한 '인싸숙소'가 우리의 인연이겠거니 하며 갈 요량이었다.
-직원: 여보세요, 요론토 빌리지입니다.
-나: 안녕하세요, 혹시 OO일에 남는 방이 있나요?
-직원: 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 헤에? (당연히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못 알아먹고 진짜 저 소리를 냄)
-직원: 이름이요, 네이무(Name)!
-나: 아!!! Kim OO입니다 (혼선을 방지하려고 인터넷으로 예약한 내 짝꿍의 이름을 말했다)
-직원: 네 키무상, 예약 됐습니다.
-나: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일단 그렇다고 하니) 오....?? 정말 감사합니다!
-직원: 네 감사합니다 (친절한 웃음)
이게 무슨 일인가. 내 두 귀를 의심했고, 어떻게 오전에만 해도 없던 방이 난 건지, 어떻게 내가 마침 다시 전화를 해서 예약을 잡게된 건지. 이 상황이 너무 기쁘고 신기하다며 직원을 붙잡고 자랑(?)을 하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혼또니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밖에 없었다.
그 직원은 알았을까, 그 짧은 한마디에 숙소 찾아 삼만리 전화 여행을 하고 온 어느 강코꾸진의 깊은 사연이 녹아들어 가 있었다는 것을..
그때 확신했다.
요론이, 그리고 요론토 빌리지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고.
이것은 영화 <안경>을 보고 방문한 자에게 내려지는 포상이라고.
TO BE CONTINUED..
ps. 사실 저래놓고도 믿을 수가 없었기도 했고, 요론 항구에서 픽업을 요청드려야했기에 다음 날 또(!!) 전화를 걸어서 예약 최종확인을 하고, 픽업까지 요청드리고 나서야 맘 편히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직원들 사이에서 한국인 번역기 빌런이 있다는 말이 돌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