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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ug 21. 2024

甲辰年 壬申月 세 번째 기록

[주간단남] 8월 3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8.12.(월) 


(..)

요즘의 일상은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며 시작하는 아침 일색이 되어버렸다. 습관처럼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오는 걸 느낀다. 그런데 왜? 왜 그러면 안 되지? 그것이 '나'의 생각이 맞나, 아니면 집단주의적 사고의 흔적인가? 


급격한 성장, 그리고 한번 크게 무너질 뻔한 금융위기를 겪고 나서 대한민국은 배금주의 사회가 되어버렸다. 한국을 보면 펜타클 4번 카드가 떠오른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는 나라가 지구상에 몇이나 되려나. 집단 속에서 개인은 그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기가 어렵다. 특히나 그 집단 문화가 개인에 대한 존중이나 보호보다는 간섭과 비교, 통제가 일상화된 형태라면 더더욱.


한국이 유독 '정답 사회'에 가까운 이유는 특유의 집단 문화 탓이 매우 크다. 그렇기에 개인주의, 그것도 올바른 개인주의가 더더욱 귀하고 빛을 발한다. 황무지에서 피어난 꽃이 더 기적적이고 아름답게 여겨지듯이. 우리에겐 우리만의 개인주의와 거기에서 비롯된 새로운 집단주의가 필요하다.


올바른 개인주의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내가 잘 살고 싶은 만큼 너도 잘 살고 싶겠구나 하는 마음이다. 상호 존중과 배려, 독립적인 영역에 대한 간섭의 배제, 삶이란 자고로 100인 100색이라는 명제에 대한 대국민적 합의. 이런 것들이 선행되어야 고루한 집단주의도 우리만의 특색을 살려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


집단주의로부터의 도피라는 차원에서 발생하고 있는 작금의 초개인주의적 형태는 답이 아니다. 소위 '알빠노'를 외쳐대는 요즘 젊은이들의 냉소적이고 시니컬한 태도는 결코 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이 소중한 만큼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나만 바쁜 게 아니라 너도 바쁘며, 나만 무시당하면 화나는 게 아니라 너도 그러하며, 나만 대단하고 열심히 살아온 게 아니라 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겠구나 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무지가 오만을 낳고, 반대로 오만도 무지를 낳으니 둘이 서로 만나면 인간과 인간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긴다. 회복의 열쇠, 그 강을 건널 뗏목은 나와 네가 결국 하나라는 연결감의 회복이요, 우리 모두는 커다란 전체의 일부라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질문하자. 

단, '대체 쟤는 왜 저래?'의 '왜'는 질문이 아님을 깨닫도록 하자. 순수한 관심, 순수한 궁금증만이 올바른 질문이 될 수 있다.




24.08.13.(화)


(..)

직관과 이성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조화란 둘 중 하나에게 온전히 인생의 항해권을 맡기는 게 아니라, 두 존재 모두가 합심하여 역할 배분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는 것에 더 가깝다.




24.08.16.(금)


(..)

그 누구도 미래에 대해서 단언해서도 할 수도 없다. 그것이 삶이라는, 운명이라는, 미래라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들 중 어떤 한 장면을 대하는 한낱 개인이 지녀야 할 덕망 있는 태도이리. 그것은 곧 상대에 대한 존중과 그리고 상대보다 한걸음 더 떨어져서 당사자가 아닌 시선에서 혹여나 조금이라도 더 넓은 관점에서 보이는 요소가 있는지를 보게 해주려는 마음에 그쳐야 한다.

운명학 상담사는 도움을 주는 존재이지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자나 전문가임을 자처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때로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자는 권위에 목을 매는 자다. 내담자의 위에 올라서려는 자다. 반대로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양 확정적이고 단언하는 태도도 지양해야 한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듯 인풋이 아웃풋을 보장한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같은 인풋도 상담사 개인이라는 고유한 발출 창구를 거치기 때문이다. 개인적 소견이지만 그렇기에 상담사는 자신의 삶과 정신세계를 늘 갈고닦아야 한다. 배불뚝이 의사에게 비만 상담을 받고, 술 중독인 상담사에게 주독 관련 상담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그래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라고 외쳤던 한 성인의 말씀처럼, 우리는 먼저 솔선수범하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는 인터넷상에 난무하는 온갖 정보는 그럴듯해 보이는 배불뚝이 비만 클리닉이 태반이라는 사실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솔선수범과 언행일치는 자격의 문제라기보다는 태도와 지향점에 대한 얘기다. 자격은 그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



24.08.18.(일)


(..)

열정을 간직한 누군가를 순수하게 지지해 주고 싶은 마음은 한편으론 책임감을 낳기도 한다. 삶이 무기력한 사람들이 요즘 많아지는 이유는 시선이 잘못됐거나 방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선의 질이라고 해야 할까, 원천이라고 해야 할까. '일단 나부터 챙겨', '내 코가 석자야'라는 식의 마인드는 책임감보다는 조바심과 이기심을 자아낸다. 

시선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나 공동체에 둔다고 그런 문제(?)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어릴 적부터 세뇌당하다시피 한 집단주의적 사고에 의해서 반강제적으로 밖으로 두는, 소위 말해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해', '모난 사람이 되어선 안 돼' 식의 시선 역시 영혼을 좀먹는 건 마찬가지다.

성인이 되고 나서 개인은 스스로의 등대를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스스로가 등대가 되어야 한다. 등대는 바깥으로 불빛을 낸다. 그것을 보고 누군가는 삶에서 큰 영감과 자극, 때로는 위로와 공감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그는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등대로 거듭난다.

세상은 온통 등대 일색이 되어야 한다. 방향도 높이도 각도도 빛깔도 그 세기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밖을 비춘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기 안에서 길을 찾는 사람은 기어코 찾아낸 자신만의 빛을 결국에는 바깥으로 뿜어내게 되어있다. 안에서 출발했지만 그 귀결은 외부다. 그것이 참된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 공동체의 기반이 된다. 등대의 밖을 비추는 행위는 그렇게 또 다른 개인의 내면에 잠재한 '광원'을 자극해 일렁이게 만든다. 나도 당신도 우리도 모두 태초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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