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들레 Jan 19. 2021

밍밍한 시작과 진한 여운

나는 왜 가야금을 시작했는가


갑자기 가야금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뭐야?



취미로 가야금을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열에 아홉은 내게 그 시작을 묻는다.

사실 저런 질문을 들으면 난 특별하게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만다.



"응, 그냥 하고 싶어서 했어."



가야금 연습실에서



언젠가부터 나의 삶의 모토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일단 해보자"가 되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해보고 싶은 건 한 번을 하고 그만두더라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도전해보자는 것이다.



20대 초중반 시절의 나는 항상 겁이 많았다.

그랬기에 항상 안전한 길만 걸었다. 최대한 내가 적은 시간을 들여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길에만 집착했다. 이로 인해 진정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못하는 일이 점점 생겨나기 시작했다.



취미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항상 생각이 많았다.

'내가 이걸 배우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해봤는데 나랑 안 맞아서 시간과 돈만 낭비하면 어쩌지?'

'회사 생활도 바쁜데 이걸 어디에 쓸 수 있을까?'

등등, 시작도 하기 전에 머릿속은 이미 다양한 질문들로 채워졌고, 결국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라는 이유로 시작조차 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가야금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배울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을 배우며 살아왔다.



그랬던 내가 잦은 야근으로 인해 일주일에 세 번 씩가야하는 업무 관련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배움 병'에 걸린 나는, 이를 계기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갈 수 있는 학원이 어디 있을까 찾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생각난 것이 가야금이었다.



검색 결과 근처의 국악학원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매주 1회 레슨을 진행하고 있으며, 나의 상황에 딱 맞게 유동적으로 레슨 시간 변경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악기는 학원에서 얼마든지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돈을 크게 들이지 않고 - 즉, 내가 초반에 바로 그만두더라도 많은 돈을 낭비하지 않고 - 가야금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그냥' 한 번 가 본 가야금 수업은 정말 재미있었다. 20분 만에 오른손 검지가 다 터져서 다음날 거대한 물집이 잡혔고, 물집이 잡힌 상태로 계속해서 연습을 하다 보니 손가락이 남아나질 않았다. 물집 속에 피가 가득 들어찬 적도 있었고 (나는 그것을 '피집'이라 불렀다) , 손이 다 까져 업무 시간에 키보드를 칠때도 통증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배운 가야금이 너무 재밌어서 매일 퇴근 후 연습실로 달려갔다. 초보자였기에 아는 것이 많이 없어 계속해서 같은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는데도, 배웠던 몇 개 안 되는 주법을 익히는 데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대학생 때 기타를 배워보려고 세 번 정도 시도하다가, 세 번 다 손가락 끝이 아파서 한 시간 만에 포기했던 내가 손가락이 다 까져도 아픈 줄 모르고 (아니, 솔직히 아픈 줄은 알았다. 좋아서 참고 연주했다) 계속해서 연습을 하다니. 기타를 쉽게 포기했던 나의 경험에 비추어,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가야금에 도전해보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즐거움이었다.



단련이 되지 않은 손가락은 금세 물집이 잡히고 까지게 된다. 나는 이걸 자랑스레 찍어뒀다.


그렇게  한번 내디뎌 본 첫발을 계기로 나는 여전히 - 1년 반 째 쉬지 않고 - 가야금을 배우고 있다. 아직 연주를 잘한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기간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만의 가야금을 가지고 있고, 더 이상 손가락이 터져서 아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주말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자 집에서 가야금을 연습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에도, 기분이 좋은 날에도, 나는 가야금을 연주한다. 거창한 이유 없이 '그냥' 시작했을 뿐인데, 나의 세계는 가야금으로 인해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내가 시작하는 대부분의 일들의 계기는 아마 이와 같이, '그냥 해보고 싶어서' 일 것이다. 무엇인가 하고 싶어지면 일단 한 번 도전해 보고, 쓰임새는 그 다음에 찾기로 했다. 깊은 생각은 최대한 지양하기로 했다. 생각이 너무 깊어 행동을 멈추는 일은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차례차례 해보고 싶은걸 해보며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 좋다. 도전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세계를 맛볼 수 있는 즐거움, 나에게는 가야금이 이 인생의 진리를 일깨워준 중요한 도구가 되어 주었다.

작가의 이전글 부끄럽지만, 마케터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