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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씨가 일순간 강한 바람을 타고 몸집을 불리며 번져나갔다.
강원도 산을 온통 뒤덮을만한 사나운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번져가는 산불과 함께 암담함, 무력감이 점차 몸과 마음을 점령해갔다.
불현듯 강원도 속초에 살고 있는 M아주머니가 생각났다. 그녀는 엄마의 오랜 친구이다.
내 부모의 결혼식 앨범에서 보았던 말간 얼굴을 한 그녀의 20대 시절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종종 엄마의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었다.
지난해 친구를 만나러 갔던 속초여행에서 돌아온 엄마의 손에는 건어물이 잔뜩 들려있었다.
또 그로부터 얼마 뒤 M아주머니는 맛 좋은 황태를 우리 집으로 부쳐주었다.
우리 가족은 그녀가 멀리서 보내온 황태로 끓인 국을 한동안 참 맛있게 먹었다.
M아주머니의 안부를 묻는 물음에 엄마는 안 그래도 연락을 해본 참이었다며 "괜찮다네."라고 말했다.
푸르름이 무성했던 산이 시커먼 재로 변하고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검게 그을린 채 무너져 내린 처참한 모습에 한동안 할 말을 잃었었다.
M아주머니의 안부를 들은 뒤엔 지난겨울 다녀왔던 카페 글라스하우스가 떠올랐다.
그곳은 괜찮을까 궁금하여 알아보니 다행히도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 이라는 말을 섣불리 꺼내기엔 시기상조 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에겐 삶 전체를 앗아가는 불행이 닥쳤을 수도 있기에
성급히 안도하는 건 아직 죄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에겐 ‘그때’에 버금가는 불행이 지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크건 작건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기에
보편적으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때'를 찾아내는 게 언제나 문제다.
그런 때가 정말 있기는 한 걸까 싶기도 하고.
속초를 떠올리면 먼저 안개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희뿌연 안개가 가득해서 시야 확보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날의 오후. 하얗게 내린 눈이 산의 군데군데에 아직 녹지 않은 채로 쌓여있었다. 와아, 탄성을 지르며 나아가던 중 우리는 순식간에 안개가 자욱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엔 앞에서 달리고 있는 차들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였지만 안개가 심한 구간에 들어서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길이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고 커브길은 코앞에 닥쳐야만 휘어짐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심한 안개였다. 표지판이라든가 지나가는 차의 형태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짙은 안갯속에 갇혀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안개 때문인지 머릿속도 뿌옇게 변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끝없이 펼쳐진 안갯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고 없이 빠져나갈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안개로 뒤덮인 산속에선 그 어떤 좋은 기술도 무력하게 느껴졌다. 오직 자연만이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나타내며 그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주 느린 속도로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기를 몇십 분, 드디어 시야가 걷히기 시작했다. 산과 안개가 우리를 놓아준 때에야 비로소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안개는 마치 속초라는 도시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가야 하는 하나의 관문 같았다. 속초,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단어가 있지만 가장 먼저 '안개와 서핑'이라는 이질적인 두 단어가 생각난다. 글라스하우스에 방문했던 때의 속초. 그건 가족여행 이후 두 번째 방문이었다. 글라스하우스에 갔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이었나. 짧은 속초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남은 오후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속초라는 도시도 물론 좋았지만 그때의 우리에겐 속초 이외의, 무언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던 중 예전에 맵에 저장해두었던 장소가 눈에 띄었다. 그곳이 생각보다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큰 고민 없이 고성으로 향했다.
그렇게 갑작스레 찾아간 곳이 바로 ‘글라스하우스’였다.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200킬로미터도 넘게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의 해변 근처 외딴곳에 자리한 어느 카페. 과연 찾아갈 날이 있긴 할까 반신반의하면서도 '우선 저장해놓고 보자’는 생각으로 점찍어두었었다. 작정하고 찾아가는 것보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상황에 이끌려 방문하는 공간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 같다. 또 막상 도착해 보니 사이키델릭 팝, 펑크 류의 음악이 나른하게 흘러나오는 데다 추운 날씨 탓에 찾아드는 손님도 적었으며 사물이 거의 비치되지 않은 널찍한 공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여름이 되면 찾아드는 여행객과 서퍼들에게 이곳이 얼마나 매력적인 공간이 될지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가게 안에 비치된 서핑보드의 완만한 곡선을 눈에 담으며 파도를 상상했다. 파도를 가르며 바다 위에 우뚝 선 서퍼가 그려진 컵에 담긴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잠이 몰려왔다.
서핑이라 하면……. 지난여름 충무로역에서 잡지 ‘빅이슈’를 사서 읽어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 서핑과 관련된 글이 실려 있었다. 서핑을 즐기는 글쓴이가 계절과 시기, 취향별로 서핑하기 좋은 포인트를 몇 군데 언급하며 그곳의 풍경과 자신의 경험을 되짚는 글을 적어두었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한 여름 서퍼들이 몰려들어 북적해질, 뜨거우면서도 어쩐지 쿨할 것 같은 해변의 분위기를 상상했었다. 서핑을 좋아하는 이의 생생한 경험이 담긴 글 덕분에 구체적인 상상이 가능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가 언급했던 서핑포인트 몇 곳에 들러보고 싶다. 글라스하우스를 다녀오고는 그런 열망이 더 커졌다. 열기로 들끓는 공간에 가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파도를 타는 이들의 에너지를 느껴보고 싶어 졌다.
어느새 거리엔 반팔 셔츠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사람들이 보인다. 여름이 코앞에 다가왔다. 나는 보통 한적하고 고요한 바다를 좋아하지만 올여름엔 무겁고 축축한 바람을 맞으며 서퍼들로 붐비는 해변으로 달려가고 싶다. 발바닥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햇볕에 뜨겁게 달궈진 깔깔한 모래를 밟으며, 한 손에 시원한 맥주를 든 채 백사장을 거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