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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림 Jul 07. 2020

불안할 때 읽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알려주는 지금의 소중함


예전에 회사 후배랑 화창한 봄날에 점심을 먹은 후 공원을 거닐며 나눴던 대화가 생각난다.


"난 언제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해. 죽는 게 별로 무섭지 않아. 근데 신기한 건 그런 생각을 하면 용기가 난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내가 왜 참아야 하지? 이왕 죽을 거면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 이런 생각을 하면 활력이라도 솟아나는 것 같다니까?"


"진짜 죽는 게 안 무서워요? 선배님처럼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그때 나를 신기하고도 이상하게 쳐다보던 후배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녀에게 보였던 나는 대찬 사람이었을까, 우울증 환자였을까.



실제 그때의 나는 생의 의지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주인공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쓰는 모험 영화를 보면서 '저런 삶의 의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궁금했을 정도였으니. 그래서 더 겁이 없었다. 죽음이 무섭지 않은데 뭐가 더 무서우랴. 그냥 어차피 언젠가 죽을 거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우울의 터널을 서서히 빠져나왔다.





어떤 이유로 불안함에 가슴이 두근거려 잠 못 이루던 며칠 전 밤, 침대에 누워서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다가 예전에 했던 그 생각이 정신승리의 주문이었음을 알게 됐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아마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든,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 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죽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알랭 드 보통「불안」 중에서


살면서 사회적 지위도, 재산도 다 중요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건 '나는 지금 행복한가' 일 테니까.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했던 나는, 사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혼자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고, 글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 관계에 대한 관심과 스트레스를 줄이고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살아도 나를 아껴주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했다. 붙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곁에서 같이 행복한 사람, 그런 사람은 몇 명이면 충분했다.


병은 세속적 사랑의 조건을 제거하여 그런 구별이 잔인할 정도로 분명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기다릴 때 우리는 우리의 지위를 조건으로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격분한다. 그들이 냉혹하게 유혹의 책략을 썼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유혹을 당할 만큼 허영심이 컸다는 사실에도 화가 난다. 죽음을 생각하면 사교 생활에 진정성이 찾아온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입원실까지 와줄 것인지 생각해보면 만날 사람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건부 사랑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줄어든다. 부,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중에서


이 설명과 함께 책에 소개된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도 내친김에 읽기 시작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판사라는 직업, 부유한 집안,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이반 일리치. 요즘 말로 그는 다 가진 사람이었다. 일처리가 정확하고, 아랫사람들에게도 적절한 예의범절을 지켰으며 스스로 그런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아내와 자주 다툼이 있긴 했지만 그건 잠시 일로 도망쳐 숨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고, 원하는 대로 멋진 집을 꾸며 남들에게 마음껏 품위 있는 삶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이 찾아온다. 옆구리가 찌를 듯이 아픈 통증, 그 통증은 그를 서서히 좀먹어가며 죽음으로 끌고 간다.

그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와중에 살이 포동 하게 오른 건강한 흰 살결을 가진 가진 가족과 지인들을 보면서 분노를 느낀다.

왜 나만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가는가. 왜 내 고통에 아무도 공감해 주지 않는가.

그러다 어느 순간 외로움과 고독보다 더 큰 어떤 감정이 그를 덮친다.



그의 정신적 고통은 전날 밤, 광대뼈가 불거진, 게라심의 졸음이 가득한 선량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만약에 정말로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이, 내 생각과 행동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의심이 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에는 전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높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싸우고 싶었던 마음속의 어렴풋한 유혹들, 생각이 나자마자 신속하게 털어버렸던 그런 은밀한 유혹들, 어쩌면 바로 그런 것들이 진짜고 나머지 모든 것은 다 거짓이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일과 삶의 방식, 가족, 사교계와 직장의 모든 이해관계도 다 거짓인지 모른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 자신에게 그 모든 것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가 변호하려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허약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무엇 하나 변호할 수가 없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는 생각만 가지고, 그걸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럼 어떻게 하지'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중에서



소설은 그가 죽고 난 후 장례식장의 모습을 먼저 보여준 후, 탄탄대로였던 그의 사회생활, 아픔이 시작되고 죽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병이 악화되면서 그가 고통을 겪는 모습은 읽는 나까지 고통스럽게 했다. 아무도 모르는 고통을 혼자 겪을 때의 그 기분을 알 것 같아서일까, 아무렇지도 않던 내 옆구리가 콕콕 쑤실 것만 같았다. 서서히 죽어가는 기분은 어떤 걸까.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인생이 사실은 다 헛것이었다고 느꼈을 때의 참담함은 어떤 걸까. 내가 죽어도 내 주변 사람들은 또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기쁠까, 슬플까.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건 우울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 찾아오지 않았기에 미리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죽는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면서 죽게 될까. 적어도 삶의 회한에 사무쳐 억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죽고 싶진 않기에 살아있는 순간을 더 잘 살아내야 한다. 어차피 내가 죽는 순간부터 주변인들은 나를 빠르게 잊어갈 것이다. 아무리 큰 슬픔도 시간이 약인만큼 다 잊히기 마련이니까. 우리가 그동안 그리운 이들을 보내고도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처럼.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나바호 인디언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지금, 조금 더 행복하자.

다른 누구도 아닌, 죽는 날의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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