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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림 Jul 23. 2020

밤산책이 우리에게 남긴 것

서늘한 밤공기, 짭짤했던 육포의 맛

시골에 이사 온 후 자동차 사용이 늘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는 가게가 전혀 없기에 무언가를 사려면 차를 타고 시내까지 15분 정도 나가야 한다. 서울에선 걸어서 30분 안쪽으로 갈 수 있는 거리는 웬만하면 걸어 다녔는데 여기선 어디 나가려면 자동차를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걸어 다니는 시간이 확 줄었다. 우리 집은 마을 제일 안쪽에 위치한 앞이 트인 집이라 정원에 앉으면 앞쪽으로 산과 들이 넓게 펼쳐지는 곳이다. 머리 식히러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자연이 항상 눈앞에서 내려다봐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집안에 앉아서도 뻐꾸기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양쪽으로 푸른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초록 향을 내뿜는다.


집 앞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캠핑족들에게는 꽤나 유명하다는 섬이 하나 있다. 깨끗하고 크고 아름다운 섬이다. 집 앞쪽으로 난 지름길로 가면 10분 정도면 갈 수 있지만 고구마밭 사잇길을 힘들게 지나가야 한다. 넓고 쾌적한 길로 가려면 집 뒤쪽 동네로 돌고 돌아 30분은 넘게 걸어가야 한다. 각자 일이 다 끝나면 저녁쯤에서야 산책할 틈이 나는데 그 산책길은 어두워지면 가로등이 전혀 없다.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산책하긴 무섭기에 이래저래 미루다 보니 어느덧 이사온지 4개월이 지나도록 섬에 산책을 다녀온 것이 손에 꼽을 정도다. 집에서도 자연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핑계로 집 정원을 벗어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마트나 시장에 가야 할 때에만 자동차를 이용해 얼른 다녀오고 그 외의 시간은 내내 집에만 있었다.  


새로운 곳에 이사 왔으니 여행하듯이 다양한 곳에 돌아다녀보자고 했던 다짐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짐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정원을 꾸미는 동안 우리는 100평 남짓한 작은 땅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우리의 공간에 심취해 다른 땅을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도 같다. 마침 코로나로 집콕할 완벽한 핑곗거리가 생기기도 했고.


프라이빗한 야외 공간이 생겨 행복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왜일까.


손잡고 걸었던 산책의 시간이 없어졌다.  


서울에 살던 시절, 우리가 자연을 마주칠 수 있는 곳은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가야 나오는 공원뿐이었다. 집 바로 앞에는 빽빽한 건물과 아스팔트 길 뿐이었지만, 그런 골목길을 지나 걸어가면 나무와 풀이 자라고 호수와 잔디밭이 있는 깨끗한 공원이 나왔다.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 초록색을 볼 수 있는 곳이 거기밖에 없었고, 공원에 가면 우리가 그래도 괜찮은 곳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더운 여름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손을 잡고 골목길을 걸었고, 시원해지는 가을엔 컵밥을 사서 공원 벤치에서 점심을 먹기도 했다. 바깥바람엔 음식을 맛있게 하는 조미료라도 든 건지 야외에서 먹는 음식은 대부분 맛있었다. 나는 공원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간은 쪼그라든 하루에 바람을 불어넣어 다시 빵빵하게 만들어주는 시간이었다.


한참 동안 나는 공원 자체가 나에게 힐링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공원으로 가는 길은 차들이 많은 지저분한 아스팔트 길이지만 도착하면 예쁜 공간이 나를 반기니까 이런 길쯤은 참을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공원이 아니라 함께 손잡고 걷는 일 자체가 하루의 휴식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항상 머무는 곳의 공기를 살짝 벗어나 일부러 몸을 움직여 걷는다는 것, 남편과 손을 잡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시장의 과일 파는 가게를 지나, 장미덩굴이 자라는 담벼락을 지나 공원을 돌며 벤치를 찾고, 숨겨둔 고민을 나누던 순간들 자체가 나에게 활력이었음을.



그러고 보면 남편과 내가 함께한 10년의 추억 중 가장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는 '함께 걸었던 일'이다. 우리는 유난히 밤에 수다 떨면서 걷는 걸 좋아했다. 아무 날도 아닌 날, 우린 그냥 삘이 꽂히면 걷기 시작했다. 홍대에서 홍제동까지, 사당에서 신림동까지, 신도림에서 신대방까지, 광안리에서 해운대까지, 우리는 많은 동네에서 걷고 또 걸었다. 조금 걷다 힘들면 택시를 타자며 시작하지만 결국 목적지까지 걷고 만다. 다리가 아프지만 이상하게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수다 떨며 걷다 불 켜진 편의점에 들어가 육포 하나를 사서 뜯어먹으며 열량을 채우다 보면 명랑만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유명한 곳을 여행한 이야기보다 그렇게 밤길을 걸었던 것에 대해 더 자주 얘기한다.


페르소나 <밤을 걷다>
"그때 광안리에서 해운대까지 걸어갔을 때, 해운대 백사장에서 고양이 두 마리가 뒹굴고 장난치고 있었잖아. 그날 봤던 고양이 두 마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아."


"우리 눈 오던 밤에 신도림역에서 지하철 끊겨서 신대방역까지 걸어갔었잖아. 중간에 구로디지털역 근처 커피숍에서 따뜻한 녹차라테 먹었던 거 생각난다. 눈이 보송보송하게 내렸던 밤이었어"


"난 육포만 보면 밤에 걸었던 거 생각나. 우리 언제 또 육포 뜯으며 걷는 거 해보자. 재밌었잖아."


혼자 걸을 때의 나는 오로지 목적지만 생각하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으며 직진만 하는 타입이었다. 내가 방금 무슨 가게를 지나왔는지, 거리에 꽃이 피어있었는지, 방금 어떤 사람이 지나갔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항상 가장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직진 거리를 생각해서 움직였고, 걷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했던 그 밤의 산책들은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더 먼길로 돌아가는 걷기에 가까웠다. 그 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밤의 서늘했던 공기와 이 시간이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은 아직 또렷이 기억난다.


함께 걸으며 나눴던 실없는 농담과 때론 진지하게 나눴던 고민, 걸으면서 무엇을 함께 봤는지가 우리의 관계를 만들어온 것 같다. 1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나오는 동안 수없이 싸우고, 분노할지언정 서로를 온전히 미워하지 않고 감싸줄 수 있게 된 건 함께 걸었던 시간에 빚진 부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잠시 공허한 기분이 들었던 건, 주변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이 자리에 고여있는 것 같았기 때문 아니었을까.

걸으면서 뜯는 육포와 시시콜콜한 헛소리가 오가는 다정한 산책이 필요하다.

별이 빛나는 서늘한 여름밤에 맥주 한 캔과 함께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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