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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림 Oct 06. 2020

미드를 무자막으로 9개월 동안 봤더니 생긴 일

영어 인풋을 무자비하게 쏟아붓는 시간

미드를 무자막으로 보기 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는, 공부 안 하고 그냥 보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쉬울 것 같아서.(솔직히, 이 이유가 90%)

둘째는, 듣기 인풋을 순수 100%로 쏟아붓고 싶다면 미드 무자막이 답이라고 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미드를 하루에 몇 시간이고 집중해서 보는 행위는 생각만큼 쉽진 않았다. 내가 놓친 대사가 뭐였을까 조바심이 났고, 영어자막이라도 켜면 낫지 않을까 끝없이 고민했고, 에피소드 한 편을 다 보고 나도 도무지 개운하지가 않았다. 처음의 며칠은 그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함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못 알아듣는 것이 점점 '덜'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영어 소리가 들리면 알아듣기 위해 곤두서던 귀와 정신이 점점 편안하게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 표정을 보면서 움직이는 그림책을 보듯 즐겼다. 신기한 건 힘을 빼자 점점 귀에 박히는 소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쉬운 표현 위주로 들리다가 점점 문장 단위로 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단어의 강세와 발음이 여러 번 듣는 와중에 저절로 고쳐진다. 생활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은 점점 한국말처럼 그 느낌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9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tracker앱으로 기록한 무자막 미드 시청 시간은 약 420시간 정도 된다.  평균적으로 하루 1.5시간 정도 집중해서 봤고, 팟캐스트를 흘려듣거나, 미드를 틀어놓고 딴짓과 병행했을 경우는 제외한 시간이다. 사실 인풋 시간 치고 그렇게 많은 시간은 아니다. 보통 1000~2000시간은 오롯이 투자해야 한다고들 하니까. 그럼에도 스스로의 발전은 분명히 느껴진다.



지금 나의 상태는 어떨까?


지금도 물론 모든 미드를 100% 이해하진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프렌즈 같은 생활 시트콤이나 아이들용 쉬운 애니는 편안하게 내용을 이해하면서 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현재 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 <보잭 홀스맨 Bojack Horseman>과 시트콤 <커뮤니티 community>, 의학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Grey's anatomy> 등을 무자막으로 즐겨본다. 에피소드마다 편차가 있지만 70% 정도는 무자막으로도 내용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물론 결정적인 부분에서 이해가 안 되면 전체 스토리가 이해가 안 될 때도 있기 때문에 가끔 영어자막을 켜서 확인하면서 다시 보기도 한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처음엔 무조건 무자막으로 본다는 것이다.  


영어를 계속 듣다 보니 소리를 듣는 관점이 조금씩 달라짐을 느낀다. 예전엔 단어 하나하나를 알아들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빠르게 흐르듯 지나가는 단어를 하나라도 못 들으면 문장 전체를 놓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모르는 표현이나 단어가 있고, 다소 놓치는 말이 있더라도 단어 자체가 아니라 의미단위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방금 무슨 단어를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의미는 이해가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려면 채워야 하는 절대량의 인풋이 있다고 한다. 뇌가 말랑한 상태인 어린아이 일 수록 인풋 절대량이 작기 때문에 배우는 속도가 빠르고, 성인일수록 그 절대량이 높기 때문에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것뿐이다. 듣기의 절대량을 채우려면 순수하게 듣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영어자막을 함께 보면 듣기와 읽기를 동시에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둘 다 제대로 안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영어자막은 듣기가 어느 정도 완성된 후 더 다양한 표현을 배우기 위해 참고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드로 소리 인풋을 쏟아부으면 어떻게 될까?


1. 뭉쳐서 외계어처럼 들리던 언어들이 점점 의미단위로 또렷해진다. 빠르게 연음 처리되며 넘어가는 단어들이 들리기 시작한다.(너무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들린다기보다는 느껴진다고 표현해야 될 정도이긴 하지만)

2. 영어를 해석하며 듣는 습관이 사라지고, 듣는 그대로 한국어 개입 없이 내용으로 이해되는 때가 많아진다.

3. 다양한 상황에서 자주 반복되는 말들은 일상생활에서도 툭하면 튀어나올 정도로 익숙해진다.

4. 발음할 때 단어의 강세와 인토네이션이 원어민과 비슷해진다. 특히 여러 번 소리를 통해 머릿속에 인식된 발음은 책 읽을 때 원어민 발음 그대로 음성 지원되는 느낌을 받는다.  

5. 미드에서 자주 쓰이는 대화 패턴은 스피킹 시 빠르게 떠오른다.


언어 인풋은 질보다 양이라는 말이 있다. 양이 쌓이면 점차 질로 변환된다. 거기에 익숙함이란 감정이 따라오면서 한층 더 해당 언어를 친근하게 느끼게 해 준다. 그렇게 가속도가 붙는 것이다.


한 예로, 경상도 사람이 서울말을 쓰려는 경우와 서울 사람이 경상도 말을 쓰려는 경우 중 어떤 경우가 더 쉬울까? 두 언어는 같은 한국어지만 전혀 다른 톤을 가졌다. 경험상 경상도 사람이 완벽한 서울말을 쓰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서울 사람이 완벽한 경상도 사투리를 쓸 수 있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서울 사람이 급하게 배워서 아무리 그럴듯하게 사투리를 흉내 내도 진짜 경상도 사람은 그 미묘한 억양의 차이를 알아챈다. 왜일까? 서울 사람이 경상도 사투리를 접하는 비율보다 경상도 사람이 매일매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서울 표준말을 접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이것도 소리 인풋에 비교할 수 있는 예 아닐까?  



흥미롭고 적당한 난이도의 미드를 찾는 법


못 알아들으면서 계속 본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진짜 외국 사람들 앞에서 그런 상태가 되는 것보다는 미드 속 배우들 앞에서 그런 상태인 것이 훨씬 편하지 않은가.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이런 정신승리도 필요하지만, 꾸준히 흥미를 가지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처음 미드 선정이 중요하다. 경험상 <프렌즈>를 뛰어넘는 쉽고 재밌는 미드가 흔치 않기에 가장 추천드리고 싶지만, 모두의 취향은 다르므로 각자가 마음에 드는 미드를 고를 수 있도록 가이드를 생각해봤다.


1. 한글자막으로 이미 재밌게 봤던 미드

이미 내용을 알고,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미드라면 무자막으로 보더라도 초기에 못 알아듣는데서 오는 저항감이 덜할 것이다. 나도 몇 년 전에 한글자막으로 전 시즌 정주행 했던 프렌즈를 이번에 무자막으로 다시 봤다. 한글자막으로 봤으니 지겨울 거라는 건 오산, 무자막으로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다. 심지어 더 재밌었다.


2. 화면의 흐름만으로도 어느 정도 내용 예측이 가능한 미드

미드를 고를 때 개인의 취향이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법률, 정치류 같은 어렵고 긴 대사 위주의 미드는 못 알아들을 시 초반의 흥미를 이어가기가 힘들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화면 진행이 단순한 시트콤이나 애니메이션, 혹은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는 미드 등을 보면 훨씬 쉽게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초반에 <프렌즈>와 함께 넷플릭스 미드 <빨간 머리 앤>도 함께 봤었다. 초보자가 보기엔 말도 빠르고 어렵다. 초반엔 멘붕이 찾아왔지만 워낙 좋아하던 이야기이고, 이야기 흐름을 이미 알기에 따라가기 수월해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3. 영어자막을 켜고 봤을 때 60~70%는 이해가 가능한 미드

위 두 가지에 해당하는 미드 중에 취향에 맞는 미드가 없다면 보고 싶은 미드를 골라 영어자막으로 한번 보자.(물론 미드를 고르고 나선 자막을 꺼야 한다) 영어자막으로 봤을 때 어느 정도 내용의 흐름이 이해가 가는 정도라면 소리가 익숙해지면 내용도 잘 따라갈 수 있을 확률이 크다. 반대로 영어자막으로 봤을 때 거의 이해가 안 된다면 당연히 소리를 들어도 이해하기가 힘들어 보는 걸 지속하기가 힘들 수 있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일단은 인풋을 쏟아부어보자. 무자비하게 펑펑!

내가 못 알아들어도 내 뇌는 잘 받아들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속이 편할 것이다. 나 또한 미드를 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내가 공부를 하는 건지 잉여 짓을 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이게 대체 늘긴 느는 건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영어 소리가 훅 들어온다. 그렇게 파도처럼 소리가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영어 소리에 점점 익숙해진다. 공부와 놀기 사이 그 어딘가, 무자막 미드의 바다에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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