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태풍처럼 강렬한 감정이다. 문명 발달과 더불어 분노는 매우 나쁜 감정이라는 도덕 프레임을 덧씌웠다. 특히 기독교, 불교 등 모든 종교 가르침에서 분노는 통제하여야 하는 매우 파괴적인 감정으로 여겼다. 종교 윤리는 분노의 공격성을 교묘하게 부각시켜 죄악시하고, 도덕규범 잣대를 들이대어 엄한 벌을 줬다. 현대사회도 이러한 도덕 관습 규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울러 사회적, 경제적 특권과 권력을 쥔 모든 기득권 세력 또한 분노의 감정을 죄악시했다. 이들은 도덕과 윤리 규범 명분하에서 시스템을 치밀하고 복잡하게 꾸며서,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게끔 하여 분노 감정을 암암리에 억압하고 통제했다.
분노는 좋고 나쁨의 감정이 아니다. 분노는 인간이 지닌 매우 소중한 감정이다. 분노의 감정이 없었다면 인간은 정글에서 생존경쟁에서 탈락하여 멸종했을 것이다. 더불어 사회 체제 변화가 더뎌서 지금도 중세 봉건체제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분노는 사회 체제 변혁과 밀접하게 맞닿았다. 사회의 불공정과 부패를 감시하고, 정의와 공정성 지킴이 역할을 했다. 분노 감정은 사회 변화의 근원적 동력원이다. 분노 공격성은 개인 인간관계를 치명적으로 파괴하지만, 사회 권력자 부패와 비리를 감시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감정이다. 따라서 인간이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하면 비겁한 태도이며, 용기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개인 분노
인간은 자신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한테 화를 낸다.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은 타인에게 무턱대고 화를 내지 않는다. 화는 인간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루어야 할 감정이다.
개인 분노 감정은 힘의 역학 관계 속에서 터져 나온다. 기본적으로 분노는 강자가 약자에게 표출하고, 안정성이 보장되고 불안감이 없어야 솟구친다. 상대방이 나보다 권력이나 부가 월등히 크다면 분노는 되레 두려움으로 변한다. 복수를 하려면 상대방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거나 동등한 힘을 가져야 한다. 물론 남자들끼리 분노가 치밀었을 땐 깡이 작동되기도 한다. 분노의 또 다른 속성은 익명성이다. 개인 신분이 노출되지 않을 때 분노는 쉽게 끓어오른다. 예컨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전화 안내원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일이나, 평소와 다르게 사람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사소한 끼어들기에도 욕을 하고 클랙슨을 연신 눌러댄다. 이는 상대방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탓에 두려움이 감소하는 까닭이다.
참고로 분노 공격성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15세에서 25세 사이 남성이 가장 공격성이 강하다. 이때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가장 높다.
호주의 심리학자 피트니스는 2000년에 직장인 175명을 대상으로 화가 나는 이유를 조사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44%이며, 동료의 게으름, 절도, 성희롱 등으로 부도덕한 행동을 봤을 때 23%, 컴퓨터 고장 등의 사유로 자신의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 때가 15%이다. 종합해 보면 직장에서 화가 나는 이유는 자신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거나 동료의 부도덕성 때문이다. 반면에 분노를 남에게 표출하는 경우는 다르다. 원인 제공자가 부하직원일 경우 71%, 동료일 경우 58%로 쉽게 화를 내지만, 상사인 경우 48%로 화를 표출하기 어렵다. 이 역시 힘의 역학 관계가 작동된다.
가정에서는 매우 다르다. 부부 한쪽에서 화를 내면 상대방도 같이 화를 낸다. 이는 힘의 역학 관계가 동등한 탓이다. 나는 이만큼 건네주었는데 당신은 왜 그 동일한 크기로 되돌려 주지 않느냐는 공평 심리가 작동한다. 사소한 일에도 부부 싸움을 하는 이유이다. 공평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화를 낸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로 공평성 문제가 적용된다. 이를테면 부모는 사랑과 경제적 지원을 아낌없이 주었는데 자녀는 그 기대를 걷어차 버릴 땐 갈등이 생기는 법이다.
집단 분노
감정은 옆 사람에게 퍼지는 전염성이 강하다. 인간의 공감 능력은 다른 동물과 견줄 수 없이 탁월하다. 엄마가 수저를 아이 입에 가져가 대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 하면서 스스로 입을 벌린다. 상대방이 웃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고, 상대방이 우는 모습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하는 팀이 이겼을 때, 마치 자기가 승리한 것처럼 두 손을 번쩍 든다. 이것이 공감 능력이다. 이러한 공감 감정은 집단 에너지로 분출된다. 이를테면 축구 경기에서 자기 팀 선수가 상대방에게 비신사적인 공격을 당했을 때 분노는 팀 전체에 순간 공유된다. 이 분노는 팀의 기운을 끌어올려 전세를 역전시키는 에너지로 변하기도 한다. 그 효과는 순식간에 일어난다.
집단 분노는 환경에 따라 그 파괴력은 폭풍처럼 강력하다. 권력을 쥔 기득권 세력이 공정성을 잃어 부정부패하여, 개인의 삶과 자존감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면, 그 분노는 집단화되어 그 기득권 세력을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한다. 프랑스 시민혁명,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그 사례이다. 군중의 단체행동은 개개인이 갖는 두려운 감정을 감소시킨다. 두려움은 용기로 변하고, 용기는 곧 정의로 변한다. 군중의 힘은 순식간에 폭발하여 거대한 사회 변혁을 가져온다.
권위적인 조직일수록 시민이나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극히 꺼린다. 깨어난 시민의식이 없으면 해악을 끼친 강자에 대한 분노도 발생할 수 없다.
간디는 분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혹독한 체험을 통해서 나는 분노를 모아 두는 한 가지 숭고한 교훈을 터득했다. 마치 보존된 열이 에너지를 내놓듯이 우리의 분노도 다스려지기만 한다면 세계를 움직일 힘을 쏟아 낼 수 있다”
인간이 분노에 대응 하는 방법이 두가지이다. 하나는 맞대응으로 분노를 실기간 표출한다. 이는 사람들이 불공평한 처우를 받거나 타자의 부도덕성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이럴 때 인간은 자존심이 무너져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 무례는 임계치를 넘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분노를 표시하라. 두려워하지 말자. 누구나 자신을 지키고 존중할 권리가 있다. 정당한 분노는 용기이며 정의이다. 시간이 지나면 바깥으로 치밀은 분노는 그 역할을 다하고 자연스럽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인내하며 화를 삭이는 경우이다. 힘의 역학 관계에서 화를 참아야 하는 상황이다. 피하는 게 비책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견디고 삭여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기분이 더러워 어찌할 바를 모른다. 집에 혼자 있으면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진다. 이럴 땐 억지라도 몸을 움직여 땀을 흘려야 한다. 그리고 천천히 감정 정리 연습을 해보자. 집안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이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 힘들지만 꾸준히 감정을 정리하는 습관을 갖자. 그러면 어느 순간 감정을 조정하는 힘이 생긴다. 비우면 단순해지고 쾌청하다. 그 공간에 새로움이 움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