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리 또한 관념이다.

by 시우

참된 이치를 진리라 한다. 어떤 논리가 모순되지 않고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 이를테면 나의 키가 170cm이다. 한국 성인 남성 평균치가 175cm라고 치면 나는 키가 작다. 나의 키가 작다는 건 객관적 사실이다. 과학에서는 객관적인 사실 진리가 수두룩하다. 반면에 인문학에서는 ‘참된 이치’가 시대와 환경, 문화, 과학 발전 속도에 따라 변화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 퓨코는 “누군가가 달을 보라고 하면 달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하는 자를 보라”라고 한다. 퓨코는 우리가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지식은 권력을 가진 집단이 만들었으며, 그 지식은 다시 권력 집단을 지탱하는 도구라고 한다. 진리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또는 권력 집단이 만든 하나의 사회규범일 뿐이다. 중세 마녀사냥이 그 좋은 사례이다. 17세기 로마 가톨릭 교황 부패와 타락에 대항하여 쇄신을 요구하는 개혁운동이 거세게 몰아쳤다. 이른바 종교개혁이다. 신구 교도들 간에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서로 상대를 신앙의 적으로 몰아갔다. 여기서 조작된 이미지가 마녀였다. 마녀재판은 종파적 갈등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마녀를 가리는 방법도 아주 간단하다. 물에 던져서 살아나오면 마녀, 죽으면 마녀가 아니라고 간주했다. 이처럼 마녀로 지목되면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이런 사례가 많다. 1923년 도쿄 부근 간토 지역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권력자는 조선인들을 마녀로 몰았다. 조선인들이 땅속에 폭탄을 넣어 지진을 일으켰고, 혼란을 틈타 남의 재산을 약탈하고, 우물에 독을 뿌리고 다닌다고 유언비어를 날포 했다. 그리고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였다. 이때 6,000명이 희생됐다. 1923년 간토 지역에서 참된 진리는 조선인 죽음이었다.


이처럼 참된 이치인 진리는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사회 통치 규범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본질은 상품교환 관계이다. 우리는 날마다 소비하지 않으면 일상을 꾸릴 수 없다. 물을 소비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자동차에서 기름을 소비하여 대기에 일산화탄소를 뿜어내며 산다. 대지에서 생산한 농산물과 사람들이 가공 생산한 유무형 상품을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상품교환으로 생겨난 연결된 망이 마을이며, 도시이며, 국가이다. 우리는 그 시민으로 살고 있다. 상품교환은 누군가가 이익을 보고,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손해를 본다. 따라서 자본주의 참된 진리는 누군가가 이득을 보고 누군가가 손해를 보는 공동체이다. 다 함께 이득을 보는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득이 강자를 만들었고, 강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리로 둔갑했다.


상품교환으로 생겨난 이득 결정체가 돈이다. 그 결과 돈은 인간 욕구를 채우고 삶을 바꾸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됐다. 사람들이 돈을 소중히 여기는 건 자연스럽다. 돈은 한가지 욕구만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욕망을 채운다. 거칠게 말하면 자본주의 진리는 돈이다.


istockphoto-1384849409-1024x1024.jpg

쇼펜하우어는 도덕은 기만이라고 한다. 길을 걷다가 쓰러진 행인을 발견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고민했다. 도와주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모른 척 지나쳐야 할까? 그가 선택한 근원이 무엇이냐? 그것의 참된 이치 도덕이다. 도덕은 흔히 선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누군가를 돕는 행위는 진정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그 행동을 하면서 얻게 될 사회적 평판 때문일까? 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이러한 동기가 없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도덕적인 행동을 할까? 대부분 사람은 스스로 도덕적인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쇼펜하우어 말을 좀더 들어보자. 현실에서 도덕적 행동이란 대부분 자신의 이익과 연결됐다. 타인을 돕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죄책감을 줄이고 주변 사람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다. 도덕적 규범을 어기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배척당할 위험이 있다. 반대로 도덕적인 인정을 받으면 더 많은 신뢰와 기회를 얻는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과연 타인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인가? 역사를 돌아보면 도덕이란 권력자들이 이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도구였다. 강자는 도덕을 이용해 약자를 억압하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규범을 강조했다.


많은 철학자는 참된 진리의 모순을 지적하고 도덕적 가치 허구를 들춰냈다. 그들은 진리란 불변의 성질을 가진게 아니다라고 한다. 진리는 어느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거나 특정 기준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어느 하나만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처한 상황 상황에 따라, 놓인 관계에 따라 바뀐다고 한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나 철떡같이 믿는 도덕적 가치도 자체 내부에 모순을 품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철학적 가치도, 도덕적 규범도 권력자의 이념도 마땅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공동체가 혼란에 빠져 허욱적 거릴때 이념의 가치가 중요한 때도 있었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현대사회에는 우리가 가진 모든 논리나 관념은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며 변화한다. 우리 삶에 관념인 진리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진리라는 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오늘 내 삶을 잘 사는 게 소중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누구나 틀린 결정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