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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May 14. 2024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그래야지, 기운이 빠져서는 안 돼. 그렇게 되면 수레바퀴에 깔리고 말 거야.(p96)” 교장선생이 공부에 의미를 잃고 성적이 점점 떨어져 가는 한스에게 한 말이다. 수레바퀴는 탐욕스러운 선생님들의 명예심이 연약한 소년의 영혼을 무참히 짓밟는다는 뜻이다. 수레바퀴는 통제 가능한 일률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제도권의 억압과 탐욕이다.  


 열두 살(1890년)이었던 헤르만 헤세는 괴핑엔에서 라틴어 학교에 다니면서 주 정부 시험을 준비한다. 이듬해 헤세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주 정부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명문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 신학교에 입학했다. 열넷 살에 헤세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신학교를 도망쳤다. 자살 기도로 정신요양병원에 생활했다. 16살에 시계 부품 공장 수습공으로 들어갔다(p177).  


 「수레바퀴 아래서」 소설은 헤세가 소년 시절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12살 소년 한스는 똑똑하고 재능 있는 수재였다. 한스는 슈바르츠발트 작은 마을에서 교장 선생님, 학교 선생님, 마을 사람들, 목사, 학교 친구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았다. 그는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공부했다. 한스는 서정적 심성을 가진 내성적이고 여린 소년이었다. 어른들의 말을 잘 따랐다. 한스는 검푸른 강물이 고요히 흐르고, 강가에는 버드나무 아래로 햇살이 빛나고, 봄이면 노란 꽃들이 줄지어 피고, 여름이면 매미 울음소리가 풀밭 너머로 멀리 울려 퍼지는 마을에서 자랐다. 한스는 낚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낚싯바늘에 메뚜기를 꽂아 낚싯줄을 강 가운데로 힘껏 던지고, 물고기가 미끼를 물고 세차게 파닥거릴 때 낚싯줄을 당기는 손맛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13살 한스는 개신교 기숙 신학교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서로 다름의 차이 속에서 마구 뒤엉켰다. 불안정한 상태로 서로를 찾아 헤맸다. 그러는 가운데 평등 의식과 독립심이 싹텄으며, 어린아이의 껍질을 벗고 자신만의 개성을 키워 나갔다. 반면에 신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내면에는 거칠고 무질서한 요소들이 있고, 자연으로부터 태어난 인간은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인식한다. 미지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을 정돈하려면 강제로 나무를 베어 내고 다듬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아이들을 다듬어야 한다. 학교의 사명은 치밀하게 계획된 훈련을 통해 아이들을 사회의 바람직한 일원으로 만드는 것이다(p50). 다수의 학생은 학교 훈육에 인내하여 졸업했다. 몇몇은 학교의 강압적이고 낡은 훈육에 호된 앓이를 하고, 종국에는 학교를 뛰쳐나가기도 하고, 파국을 맞기도 한다. 당시 독일 사회에서 청소년 자살률이 사회문제가 됐다. 


  한스는 같은 방에 있는 하일러와 한바탕 거친 충돌을 통해서 절친한 친구가 됐다. 하일러는 자기 나름의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열정적이고 자유로웠다. 그는 남들과 다른 고민에 빠져서 주변 것들을 경멸했다. 낡은 기둥과 담장의 아름다움을 이해했으며 환상적인 시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p74). 한스는 하일러가 모든 것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데 놀랬다. 그는 때때로 친구들 앞에서 엉뚱한 성격을 드러냈다. 모범생이었던 한스는 하일러를 통하여 성장통을 겪는다. 교장선생은 한스와 하일러가 가까이 지내지 것을 만류해 보지만, 그들의 우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일러는 제도권 교육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는 신학교를 도망쳐 나간다. 그 이후로 한스는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기가 몹시 힘들었고, 흥미가 없으니 책들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의미를 잃은 공부는 지겨웠다. 한스는 학교에서 선생들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는 몹시 지쳤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린 한스는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한스는 고향에 돌아와서 불안감 속에서 자연에 기대어 몸과 마음을 서서히 회복한다. 그리고 16살에 기계 수습공으로 일을 한다. 늦가을 집으로 가는 길, 어두운 강물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떠내려갔다. ‘한스가 어떻게 물에 빠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길을 잃고 발을 헛디뎠거나, 물을 마시려다가 넘어졌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름답게 빛나는 강물에 이끌려 물속으로 몸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밤의 차가운 달빛 아래서, 피곤과 두려움에 짓눌려 죽음의 그림자를 따라갔는지도 모른다(p172)’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책에서 중앙대 교수 김누리는

 ‘독일 학교에서는 등수로 줄을 세우지 않는다. 아예 석차라는 것 자체가 없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교육의 기본 정신이기에 부진한 학생의 첫 번째 도우미는 항상 동료 학생이다. 다양한 차이가 있을 뿐 획일적인 우열이 없으며, 다채로운 개성이 있을 뿐 일등도 꼴치도 없다.’고 한다. 

독일은 19세기 말 오늘날 우리네 사회처럼 우열을 가려 ‘학습기계’를 만들어 냈다. 그들은 집단 시민의 성찰을 통해서 ‘학습기계’ 육성을 멈추고 개인의 차이를 존중하고 개성과 재능을 이끌어 내는 교육을 하고 있다. 


 지식 습득만을 절대시 하는 ‘학습기계’가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가끔 ‘학습기계’ 정치인들을 보면, 학교를 졸업 후에 단 한 권의 책을 깊이 있게 읽었을까? 라는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하고 있다. 한 개인이 기울인 어떠한 노력도 학벌의 벽을 넘어서기 어려운 ‘학벌 계급사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학벌을 묻고 확인하고 평가하고 평가당하는 걸 당연시하고 열광하면서 살고 있다. 나도 그 범주에서 빗겨서지 못함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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