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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May 14. 2024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

저자는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다. 1931년(27살)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를 받았다. 유대인이었던 저자는 3년 동안 강제 수용소 다하우와 아우슈비츠에 감금되었다. 죽음의 수용소 폴란드 아우슈비츠에는 1944년 10월 19일에 수용되어 1945년 4월 27에 풀려났다. 아우슈비츠에 7개월 동안 수용됐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죽음과 생존을 기록한 것이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저자는 정신과 의사였으며, 정신 치료법 로고테라피(logotherapy) 학파를 창시했다. 자녀는 없었으며, 여동생을 제외한 그의 아내, 가족은 사망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존확률은 28명당 1명이라고 한다. 생존과 죽음은 자석의 양극단처럼 상반되지만 공존한다. 죽음과 생존 사이에 어쩌면 인간이 한 번쯤 생각했을 법한 극단의 두려움이 있다. 저자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책을 통하여 두 가지를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저자는 육체노동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생물학적 나이다. 둘째 그의 직업과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 결정적인 행운이 작동된 듯하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p17).’ 저자는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절대 조건은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Logos는 그리스어로 ‘의미’를 뜻한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첫 번째 판결, 왼쪽 어깨를 치면 곧바로 화장터로 직행했고 오른쪽 어깨를 치면 수용소에 남아서 혹독한 시련을 견뎌야 했다. ’나는 외투 속에 감춘 빵 봉지가 몸을 왼쪽으로 약간 기울게 했다. 하지만 난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했다. 친위 대원은 나를 살펴보면서 약간 망설이는 듯했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민첩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자 그는 내가 오른쪽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내 어깨를 돌렸다. 그래서 나는 오른쪽으로 가게 됐다(p35). ‘ 함께 들어온 사람들의 90퍼센트는 죽음을 선고받았다. 판결은 몇 시간도 못 돼 집행됐다.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역에서 곧바로 화장터로 직행했다. 화장터 문에 여러 나라말로 ’목욕탕’이라고 쓰였다.  


무감각

 소년의 발가락은 이미 동상에 걸려 있었고, 의사가 집게로 시커멓게 썩은 살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는 바라보는 우리는 정말로 혐오감과 공포, 동정심 같은 감정을 더 느낄 수 없었다.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죽어가거나 또 이미 죽은 것을 너무나 일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창문 옆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뜨거운 수프를 먹고 있었다. 우연히 창밖을 보았다. 방금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었다. 


모멸감

  나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가 딱 한순간 숨을 돌리기 위해 손을 멈추고 삽에 몸을 기댔다. 바로 그때 감시병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나에게 준 고통은 주먹질이 아니었다. 욕지거리할 가치도 없는지 장난하듯이 돌멩이 한 개를 나에게 집어던졌다. 벌을 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짐승을 항해하는 행동같이 느껴졌다. 


체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체념 상태’에 이른다. 아침 다섯 시에 잠자리에 일어나는 것은 물론, 밖으로 일하러 나가는 것도 거부하고, 대신 막사에 남아 똥과 오줌에 절은 짚 더미 위에 누워 있기를 고집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아무것도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경고나 협박도 소용없다. 그런 다음에 아주 전형적인 행동을 한다. 주머니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담배를 꺼낸 다음 그것을 피기 시작한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가 앞으로 48시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p201)‘ 

 

삶의 의미와 행복

 저자 프랭클이 창시한 정신 치료법 로고테라피를 따라가 보자. 시련은 피하고 예방하는 게 최상 방책이지만, 죽음의 수용소처럼 불가피하게 맞닥뜨렸다면,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의미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삶의 의미는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사회환경에 따라 다르다. 각 개인은 삶의 풍미를 결정하는 개성의 질을 지녔으며, 저마다 고유한 유일성을 가진다. 인간은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일과 타인과 다른 어떤 사명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저자는 삶의 의미는 추상적으로 질문을 하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네 사회는 ’각 개인이 행복해야 한다‘ 고 늘 아우성친다. 행복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윽박지른다. 프랭클은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한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함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다. 웃음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을 웃게 하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면 된다.(p200)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다. 그때 보이지 않았던 이면이 보인다. 여전히 뒷부분으로 갈수록 잘 읽히지 않는다. 저자 프랭클이 이 책의 마지막 단락에 쓴 글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 세상에 신神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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