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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May 14. 2024

스토너, 존 윌리엄스

부제 :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본질 감정이다. 심리학에 따르면, 감정은 외부에서 자극을 받아 내면에서 발생하는 반응이다. 감정은 마음속에 분명 지니지만, 어린아이처럼 어디로 튈지 몰라 다루기 어려운 에너지이다. 가을 으스름 녘 산책을 하다가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문득 외로움을 느낀다. ‘떨어지는 낙엽’은 외부 자극이고, ‘외로움’은 내부에서 반응하는 감정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감정 공통분모이면서 서로 다르다. 고독은 혼자서 에너지를 쏟아서 무언가를 채우는 즐거운 감정이다. 고독은 채움의 감정이다. 고독은 유쾌한 감정이다. 이를테면 책 내용 재미에 몰입하여 깨달음을 얻고 즐거움을 채우는 이치이다. 반면에 외로움은 사회관계에서 혼자 떨어진 외톨이 슬픔 감정이다. 외로움은 빈 가슴이며, 상실 감정이다. 외로움은 불쾌한 감정이다. 불쾌한 감정은 고통을 수반한다. 외로움은 심리적 문제와 잇닿는다. 외로움을 잘 느끼는 사람은 마음속에 단추가 있다. 이 단추는 자신도 모르게 잘 작동된다. 외로움과 고독은 내향적 성격을 지닌다. 철학자 폴 틸히리는 “외로움(Loneliness)은 혼자 있는 고통, 고독(Solitude)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이라고 정의한다.


  존 월리엄스 장편소설 「스토너」, 스토너 그는 일생을 고독하게 살았다. 그에게 스며든 고독은 그와 더불어 동행하고 친구가 되어 마침내 편안함에 이르렀다.

 

  월리엄 스토너는 척박한 땅에서 힘겨운 농사를 하며 자랐다. 관청의 권유로 미주리 대학 농업학과에 들어가서 영문학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는 낮에 농사 일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공부를 했다. 이를 불안하고 불편해하지 않았다. 스토너는 한 번도 자신의 장래 진로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처 슬론 영문학 교수의 권유로 대학강사가 된다. 1차 세계대전 전쟁이 발발했다. 대학은 술렁거렸고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갔다. “힘들 거야, 여기에 남아 있으면” 슬론 교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학에 남았다.(p8~57)

 

 젊은 시절에 전쟁 참여 지원을 결정해야할 때, 애국심과 정의감, 비겁함이 서로 날카롭게 충돌했다. 그는  숙고를 거듭했다. 스토너는 자아 본질에 순응했고 자기만의 습성에 따라 결정했다. 주변 따가운 시선을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았지만, 당당히 나서지도 않았다. 사람은 저마다 본질 고유 주파수를 지닌다. 파동은 상한치와 하한치가 있게 마련이다. 경계선을 넘을 때 더듬이 촉수가 작동하여 위험을 감지하고 이내 고유 파동에 수렴하려고 애쓴다. 스토너 본성에 고독이 내재하여 있다. 그는 고독 기질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어떤 길을 따라 고독 기운이 뚜벅뚜벅 걸어 내면에 들어왔는지 알지 못했다. 스토너는 평생 고독과 더불어 아름다운 동행을 했다. 

 

▶고독은 결혼을 서툴게 한다.

 스토너는 결혼에 몹시도 서툴렀다. 처음이라서, 이성을 만나본 경험이 없어서 낯선 게 아니라 기질적으로 서툴렀다. 생소함은 그에게 자연스러움이다. 그는 그녀의 커다란 눈에 매료된 직감 충동을 사랑이라 여긴다. 스토너는 어떤 일을 따지기 보다는 주어진 일을 수용하는 게 덜 불편하다. 누구나 결혼은 피드백이 안된다. 멈추지도 나아가지 못하는 길에선 청춘은 때론 서툴다. 순수해서 서툴러서 청춘은 매력넘치는 법이다. 결혼에서만 스토너 고독 기질은 작동을 멈추었다. 출처를 알수없는 열정에너지가 결혼을 지배했다. 돌출하는 에너지가 가끔 우리네 삶을 관장하는 까닭이다.   

  

 스토너는 결혼생활을 묵묵하고도 성실하게 실행한다. 아내 이지스가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한다. 까칠함은 그녀의 몫이었다. 갓난아이 딸 그레이스의 먹거리를 챙기고 목욕을 시킨다. 한가한 시간에 서재에서 스토너는 공부를 하고, 딸 그레이스가 장난감 갖고 놀 때, 그는 소소한 행복감에 젖어 든다. 고독한 기질을 가진 사람은 작은 일에도 행복을 느낀다.


 이디스 그녀의 커다란 그 눈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연한 파란색이었다. 그 눈을 보면 그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로 끌려가는 듯했다. 스토너는 첫 만남에 사랑에 빠졌음을 확신했다. 이디스 그녀를 만난 지 3주 만에 청혼했고 결혼을 했다. 이디스는 무남독녀로 일찍부터 외로움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고, 안색은 창백하고 웃음기가 없었다. 그녀는 지극히 형식에 집착했으며, 히스테리를 부리고 타인을 공격하는 게 몸에 배었다. 그녀는 어떤 일이든 간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기분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스토너를 외면하고 내면으로 들어가. 아무 말 없이 견디기만 했다. 한 달도 안 되어서 이 결혼은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버렸다.(p63~125)

 

▶고독은 일(Works)에 열정을 이끈다.

 스토너에게 출세와 욕망은 부자연스럽다. 그는 단지 자신 일에 열정을 기울여야만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그는 외향적 형식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스토너는 마음속에 강물처럼 유연하면서도 끈질긴 에너지를 지녔다. 그는 내면적 힘이 고갈될 땐 잠시 멈추기도 하고 으스러지기도 한다. 끈기는 그가 가진 마력이지만 그의 목덜미를 잡기도 한다. 몹시 잘하려고 애를 쓴 까닭에 되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는 자기 성찰에 미약하여 스스로 기만할 수 있지만,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일은 기필코 끌어안는다. 스토너의 삶을 지배한 고독한 기질은 일의 이면에 도도하게 흐른다.

 

 스토너는 영문학 공부에 몰두했다. 교육자로서 성실하게 강의했으며, 인기도 있었다. 논문과 책도 썼다. 학문에 깊이가 있었다. 그는 종신직 부교수가 됐다. 스토너는 대학원 세미나 과정을 개설했고 정원을 채웠다. 동료 교수 로맥스 부탁으로 박사과정 2년 차 찰스 워크 학생이 추가 등록했다. 게으르고 부정직한 가짜 보고서를 꾸며 제출한 워크 학생에게 스토너는 F학점을 주었다. 구두시험 재 기회를 주었으나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 이 일로 동료 교수 로맥스 는 심사과정의 부당성과 학생 편애 트집을 잡아 스토너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로맥스가 영문과 학과장이 된 이후에 이 공격은 더 노골적으로 지속됐다. 그는 학점 평가와 개인적 인간관계를 분리하여 화해를 청 해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그 이후 부당한 행위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움쳐러 들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학문에 의지력이 퇴화한다. 그는 어둠 속에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p209~253)


▶고독은 사랑을 동경한다.

  스토너는 캐서린 드리스콜 그녀를 몹시도 사랑했다. 불륜의 사회적 벽에 막혀 쉽사리 나아가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보다는 자신 내면 에너지가 두려웠다. 사랑 또한 고독의 기질에 그는 순종했다. 그게 불편하지 않으니까. 그의 사랑은 열정적으로 타올랐다 차갑게 식어가는 통속적 말장난을 거부했다. 숨이 멈추는 듯한 설렘을 숨기고 또 숨겼다. 그의 사랑은 너무나 서툴러서 조심스러웠다. 마침내 사랑이 편안함에 이르렀을 때 관능이 새록새록 새로웠다. 그의 고독 본질은 일생을 관통해 사랑을 동경했다. 잠재되어 있었을 뿐이다.  


 불륜은 거친 낱말이다. 뜻풀이하면, 기존에 속해 있던 무리(倫)를 부정(不)하도록 만드는 감정이다. 누군가가 사랑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불륜이라고 말한다. 불륜에 깃든 역설을 쉽사리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반면에 결혼은 육체와 정신을 제도적으로 소유하는 제도이다(에리히 프롬). 결혼은 인륜적 관계다(헤겔). 그다지 동의 되지 않는 명제다. 사랑에 관하여, 이기적이며 편협적 사회관념이  표독스럽게 뿌리 깊다. 사랑은 서로에게 조연에서 주인공으로 탈바꿈 시킨다. 사랑은 늘 위대하다.   

 

 마흔세 살 스토너 몸은 호리호리했고 삶에 의지력을 잃어갔다. 대학원 세미나 강의를 들었던 젊은 강사 캐서린 드리스콜이 찾아와 자신의 논문을 봐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그는 무기력에 빠져 논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해진 일정 때문에 건성으로 논문을 읽었다. 논문을 잃자마자 그는 빠져들었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는 예의 바르고 상냥했으며 말수가 적었다. 그녀는 스토너를 존경했다. 그는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깨달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이런저런 구실로 허둥지둥 떨어졌다. 그러한 와중에 그녀가 아파서 강의를 나오지 못했다. 그는 가슴을 찌르듯 한 통증을 느꼈다. 그의 결심과 의지력이 그를 두고 떠났다. “저는 아픈 게 아니예요” “저는 절망스러울 만큼, 절망스러울 만큼 불행해요” 그 날카로운 말이 칼날처럼 그를 찔렀다.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사랑을 나누었다. 아무리 놀아도 지치지 않는 아이들 같았다. 사랑에서 시작된 감정이 욕망을 거쳐 관능으로 자라는 순간마다 계속 새로웠다. 두 사람은 사랑과 공부가 마치 하나인 듯 일체감을 이루었다. 두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 필연적인 일이 되었다. 함께 느끼는 행복이 커서 바깥세상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기존 관념’에 따르면, 이른바 그의 ‘불륜’이 진행되면서 가족과 관계가 꾸준히 악화하여야 마땅했다. 오히려 꾸준히 나아지고 있었다. 그는 시치미를 떼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자신과 캐서린 드리스콜의 관계를 숨겨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남들에게 자랑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등쌀에 괴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로맥스 학과장이 교묘한 솜씨로 소문을 냈다. 그리고 드리스콜 강사 해고를 하겠다고 협박했다. 스토너는 모든 걸 잃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도 사랑을 지키려고 했다. 드리스콜은 “그러니까 결국 우리도 세상의 일부인 거요, 그걸 알아야 하는 건데. 아니 알고 있지만, 조금 뒤로 물러나서 그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녀는 서둘러 스토너를 떠났다.

 

 스토너는 생애 처음으로 병을 앓았다. 그는 원인이 불분명한 엄청난 고열에 시달렸다. 겨우 일주일이었지만, 기운이 쭉 빠져서 몹시 수척해졌을 뿐만 아니라 후유증으로 청각 일부를 잃어버렸다. 그는 너무나 쇠약해졌다. 백발이 되었고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스토너는 학문에 흠뻑 빠졌다. 그의 강의는 전설이 됐다. 예순 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p254~ 392) 

 

 밖은 어두웠다. 봄의 싸늘함이 저녁 공기 속에 배었다. 스토어가 심호흡을 하자 서늘한 기운에 몸이 찌릿찌릿했다. 들쑥날쑥 집들의 윤곽 너머로 시내의 불빛들이 엷은 안갯속에서 반짝거렸다. 길모퉁이의 가로등이 사방에서 밀려오는 어둠을 밀어냈다.

 

 “위대한 소설이라기보다 완벽한 소설이다. 이야기 솜씨가 워낙 훌륭하고 문장은 아름다우며, 감동적이라서 숨이 막힐 정도이다” 뉴욕 타임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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