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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gseop May 23. 2020

내 방만 바꿨다

2020.05.22


맑은 하늘에 빗방울이 드문드문 맺힌다. 여우비라고 하나. 어렸을 적에는 하늘이 이렇게 변덕을 부릴 때면 여우를 사랑한 구름 이야기를 상상하고는 했지만 돌풍으로 날아온 빗방울이라는 과학적 이해를 떠올려버리고 나면 이야기가 더 전개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집안의 가장 큰 창가로 책상을 끌어다 붙여놓고 발코니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는 창밖을, 내 머릿속에 단어들이 어렴풋이 내릴 때는 모니터를 교차하면서 응시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돌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사무실과 보금자리의 경계에서 아직 정돈되지 않은 집은 혼란스러운 가구 배치와 널브러진 잡화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회사 동료들과의 미팅을 위해 늘 잘 정돈된 한 편의 공간이 있다. 가정집에 수시로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무척 낯설다. 다만 지금 걸려오는 비디오 콜은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목소리를 관찰하는 눈도 달려 있으니 좁은 집이 더 좁아진다. 


문득 주공아파트 15평 작은집에 네 식구가 졸망졸망 부대끼며 살았던 지난날이 기억난다. 작지만 편안했던 추억 빼곡한 아지트가 열네 살 나의 작은 항의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12평 발코니 달린 지금 집도 구석구석 청소를 하려면 꽤 애를 먹는데 15평 집이 비좁게 느껴졌던 날이, 프라이버시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날인지 아버지가 항의하던 나의 휴대폰을 던져서 깨부수었던 날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좌우지간 그날로 집은 내게 한 없는 속박이었다.


지역번호 02를 쓰는 경기도 권역에서 자란 나는 변두리 콤플렉스 때문에 오래된 서울, 서울중의 서울이라고 불리는 성북동으로 나와 살았다. 중심에 대한 반발심으로 스스로를 아프리카 대륙의 오지로 내모는가 하면, 깊이 없는 껍데기가 싫다며 유럽에 나가 살기도 했다. 그 짐도 채 가져오지 못하고 한국 땅에 정착하겠노라고 바다가 가까운 강릉에도 지내봤지만 내 뿌리는 늘 변덕이라는 바위에 부딪혀 떨어지는 파도의 포말 같았다.


정처 없이 사는 게 내 복이라면 어디 작정하고 떠나보자 싶어 올해 초 순례길에 올랐는데, 창궐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 두 발을 3개월이 넘도록 베를린 북부의 한 아파트에 묶어두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잠시 들른다는 것이 이웃주민이 되어 지내는 처지이다. 집 앞에는 붕괴된 베를린 장벽 몇몇 부분이 조형물로 남겨진 공원이 있다. 1989년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 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며칠 간격을 두고 내가 태어났는데, 그 길을 걸으면서 미약하지만 이것도 인연일까 억지를 써보기도 한다.


Berlin 1 © Yolanta C. Siu


3개월 정도 지내다 보니 여행으로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종종 눈에 들어온다. 먼저는 독일의 겨울이 보여주는 지독한 우울감인데, 햇빛을 보기가 거의 어려울 뿐 아니라 변덕스러운 비바람과 이명이나 두통 같은 삶을 갉아먹는 이유모를 불편함이 4-5개월간 지속된다. 짧게라도 햇볕이 나면 득달같이 나와 온몸을 쪼이며 비타민D를 생성하는 게 이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현대식 교외 주거지나 특별히 조경을 하지 않는 베를린의 공원과 녹지가 다소 음산하게 느껴진다. 그라피티가 밀집되어 있는 곳을 지나갈 때면 다시 2차 세계 대전 직후를 떠올리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적이 뜸하거나 비정상적으로 밀집된 장소는 오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맑은 햇볕과 봄기운이 도시에 돌기 시작하면 르네상스 시대를 품고 있는 여느 서유럽 도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매력을 볼 수 있다. 골목골목을 산책하면서 나는 한국의 80년대 주공아파트 개발지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고만고만한 현대식 저층 아파트가 많고 근래 30년 동안 베를린 시가 노력한 공원 조성(온전히 방치하는 방식의)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70-80년대의 주공아파트 단지들이 녹지율이 높은 아파트 조성 방식 때문에 자연과 매우 가깝게 느껴졌던 유일한 도시 풍경이다. 단지 내 공공장소들, 텃밭이나 잔디밭 혹은 정자나 모래밭, 놀이터 같은 시설에 사람들이 늘 북적이던 날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한국의 주거 형태는 서로 닮은 저층 아파트에서 무늬만 대리석인 단조롭고 창백한 마감의 대형 주상복합 건물로 탈바꿈하고 각 세대의 평수는 3배 이상 넓어졌다. 또 청순하고 소박한 두세 글자 우리말 이름에서 그리스 신화를 연상시키는 럭셔리한 이름으로 개명까지 했지만 여전히 서로 닮은꼴에 주위 장소와는 어울리지 못하는 이 외래종은 어떤 감동도 없다. 재개발이 되고 난 뒤에는 다시 찾아가면 사막처럼 텁텁하고 갑갑한 느낌밖에 남아있지 않아 아직 까지 재개발권을 놓고 투쟁하는 이웃 동네를 보고 있으면 씁쓸한 마음이 감추어지지 않는다. 아스팔트로 미장된 열매 맺지 못하는 죽은 공간에 더 이상 어떠한 향수도 느낄 수 없다. 이 사실이 베를린에서 맞는 칼바람보다도 시리다.


어쩌면 '집'이라는 것이 한순간도 물리적인 공간으로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것은 대게 사람이나 추상적인 감정으로 되새김하는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그곳에 없거나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그때와는 다르기 때문에 고향을 그리워하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Berlin 2 © Yolanta C. Siu


느닷없이 집을 매개로 이리저리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가득 채우고 눈에 띄지 않던 문제들이 집 밖으로, 사회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의 대다수의 나라가 경제적 손실을 감안하고 시민들을 자택에 격리시켰다. 얼마 못 가서 이 상황이 해지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 경제라는 세상을 쥐고 흔드는 돈의 권력에 저항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집이라는 곳이 안전과 가장 밀접한 곳이라 믿고 취한 조치일 텐데 이 또한 예상과 현실에 큰 괴리가 있는 듯하다. 이번에는 가정폭력이 연신 화두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가정폭력 빈도가 높아져서 사망에까지 이르는 사고들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특별히 가정폭력 신고가 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가정폭력이 늘지 않았다는 지표는 또 아니다. 실직과 재정문제, 제한적인 신체활동과 심리적 고립감 모두가 복합적으로 상호 작용하며 생기는 에너지가 모두 가정에서 폭발한다. 불안이 분노가 되고, 짙은 코로나 블루는 가장 약한 사람의 피부부터 멍들게 했다. 바이러스는 이제 가장 사적인 곳까지 맹렬하게 파고들어 외면했던 우리의 일상까지 파헤쳐버렸다. 가정이라는 마지노선까지 다시 전선이 되고 나니 그 위에 벌거벗은 우리 존재가, 수치를 모르는 우리의 민낯이 참 애잔하다.


며칠 전 동네 동갑내기 친구 하나가 죽었다. 더러는 우리가 함께 자란 개천에서 용이 났다며 사진 속 성공한 사업가 그녀와 각종 휴양지, 값비싼 상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더러는 화려한 사진과 함께 포스팅된 그녀의 토막글 속의 우울감과 상실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마지막에는 그녀의 굴곡진 삶과 최근 수렁에 빠진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들만 남았다. 혼란스러운 풍문들은 그 젊은 삶이 죽어가고 있었는지, 갑자기 죽었는지 따져 물으며 두 번 죽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를 깊이 애도할 수 있을 만큼의 관계랄게 없어 정확한 사인도 듣지 못했지만 우리가 함께 지나고 있었던 시대를 안주삼아 속 달래며 멀리서 그녀의 명복과 남겨진 가족의 안녕을 기도한다.


올해 초 나는 조금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며 잃어버린 꿈을 찾아 호기롭게 여행을 나섰다. 10년을 넘게 일해온 외식 산업의 일선에서 도망치듯 떠났다. 애당초 이 일을 시작한 이유가 우리 사회가 건강한 섭식, 섭생하도록 이바지하는 것인데, 뒤돌아보니 나와 내 주변인 모두 장사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정에서부터 잘 먹고 마시는 것이 건강한 사회의 뿌리라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더 튼튼하고 발전된 외식 산업을 이루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이 가정의 건강이라고 남들 앞에서 역설하면서도, 정작 그 가치들을 비즈니스라는 이름 뒤로 미루고 타협하며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날을 스스로 설득하기 바빴다. 먼저는 시장 경제 공동체와 어울려야 했으므로 얼굴에 분칠하고 남의 털 뽑아 몸에 박고 살았던 그 불편한 위장극을 이제야 내 손으로 끝내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위대한 여정에 오르자마자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풍차를 만났다. 무정하고 냉담하게 그러나 쉼 없이 세차게 돌아가는 풍차의 날 앞에 벌거벗은 나약한 인간을 마주한다. 

Berlin 3 © Yolanta C. Siu

“있지도 않은, 밀가루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만든 빵을 찾는답시고 세상 방방곡곡 쫓아다니지 말고 집에 계세요.” 
돈키호테가 첫 번째 가출에서 돌아왔을 때 조카딸이 그를 말리면서 말했다. 


제 발로 회사를 나왔으니 실직의 두려움도 없고 제 발로 보금자리를 떠났으니 불편한 곳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지만, 방향 없는 물체는 속도도 없다고 했던가! 뚜렷한 목적지 없는 가벼운 발걸음이 괴롭고 돌아갈 곳 없는 방랑이 두렵다. 


그럼에도 꿋꿋이 순례의 길 위에서 시를, 문학을, 모든 단어 하나하나를 기도하듯 묵상한다. 오늘 밤에는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이 마음에 턱 걸려 나를 조롱하고 위로하길 반복한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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