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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아리 Oct 30. 2022

서촌계단집에서 우리는 울었네

서울의 K대를 재학 중인 고향 친구 양갱이 대면 시험을 위해 서울을 왔다. 양갱은 나와 7살 때부터 친구였고 12살 때 절교를 한 후 20살 때 다시 친해졌다. 나는 절교 한 이유를 기억하지 못한다. 양갱의 말로는 어느날 내가 말도 없이 사라져 한참을 찾아 다녔는데 알고보니 다른 친구와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양갱과 마주친 나는 사과도 하지 않고 계속 태연하게 다른 친구들과 놀았다고 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시절 나는 그럴 법해서 부인하지 않았다. 양갱에게도 말했지만 그때 양갱이 잘난 척을 많이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갱에게 썼던 편지에 이런 문장도 있다. '너는 다 좋지만 잘난 척이 조금.. 아주 조금 심한 것만 고치면 좋을 것 같아.' 우리는 그날 이후로 한동안 인사도 하지 않았고 중학교 때 같은 반이 되어서야 인사 정도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친구와 나는 몇 년 지기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7살 때부터 알긴 했는데 16년 지기라고 해야 할지 23년 지기라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 했다. 어쨌든 우리는 16년을 넘게 함께 해 온 둘도 없는 친한 친구임은 틀림없다.


시험이 끝난 양갱이 우리집에서 3일간 머물기로 했다. 첫날은 집 근처 숯불닭갈비를 먹었고, 둘째 날은 집에서 꼼짝도 하기 싫어 배달음식을 먹었다. 마지막 날은 그래도 서울까지 왔는데 맛집 하나는 가야 하지 않겠냐며 서촌계단집을 가기로 결정했다.


출발 전 화장을 하던 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이사를 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몇 곳의 집을 보고 온 것이 문제였다. 중개인은 내가 원하는 금액의 집은 햇빛이 들지 않고 낡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대신 좋은 집에 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깡통전세 사기를 제안했다. 사기보다 낡은 집 밖에 가지 못 한다는 내 주머니 사정을 일깨워준 중개인이 야속했다. 아니 사실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스스로가 야속했다. 이제쯤 월세 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치를 꿈꿨다는 생각에 민망하기까지 했다. 우울한 나는 양갱에게 이럴 때 들어야 하는 노래가 있다며 뮤지컬 '빨래'의 '서울살이 몇 핸가요?'라는 노래를 켰다.

"어떤 친구가 이 노래 들으면서 엄청 울었다고 했는데.. 그때는 이해를 못 했는데 나도.."

말을 하다 목이 메었다. 양갱은 크게 웃었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이제 다 울었나?"

양갱의 말에 서러운 눈물을 닦고 서촌계단집을 출발했다.

서촌계단집은 경복궁역에 있는 맛집이다. 미더덕 회, 갈치회, 거북손, 꼴뚜기 회, 홍새우 회 등 특별한 해산물을 파는 곳이다. 가격대도 모두 2~3만 원대로 저렴하고 양도 푸짐해 웨이팅이 장난 아니다. 우리는 운 좋게 대기 번호 3번이 되었고 30분 정도만 기다리고 먹을 수 있었다. 고민 끝에 갈치회와 산새우회를 주문했다. 원래는 갈치회와 홍새우회를 먹고 싶었지만 그날은 홍새우를 팔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슬프진 않았다. 예상대로 되지 않는 상황도 재밌었고 서울 최고 맛집에 왔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서러웠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제일 먼저 홍합탕과 갈치회가 나왔다. 원래 갈치회는 서울에서 팔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 자칫 비린내가 나기 쉽기 때문에 신선도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맛집이긴 하나 혹시 비린내가 날까 걱정했는데 생강과 고추가 듬뿍 들어간 막장에 찍어 먹으니 고소한 맛뿐이었다. 정말 맛있었다. 우리는 달달한 청하 한 병과 갈치회를 정신없이 먹었다. 양갱이 9시 반 기차를 타고 밀양으로 내려갈 예정이라 술도 음식도 더 빠르게 먹었다.

"서울 너무 좋잖아!"

몇 번을 한 말인지 모르겠다. 술이 들어갈수록 서러웠던 서울살이가 마냥 좋게 느껴졌다. 청하 한 병, 소주 3병을 다 마실 때쯤 양갱이 어릴 때 함께 술을 마셨던 기억을 얘기했다.

"기억 안 나나? 우리 그 때 같이 울었잖아."

스무 살 때, 조디라는 아이와 셋이 술을 마셨고 나와 양갱이 갑자기 각자의 아픈 이야기를 꺼내며 울기 시작했다고.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셋이 앉아 엉엉 울고 다 같이 양갱의 집에서 잠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날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태 조디라는 친구와 나는 말도 섞어본 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양갱의 말로는 조디는 그날 우리를 양 옆에 두고 등을 두드려주며 많이 위로해줬다고 했다. 어렴풋이 그날의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떠오르는 장면들이 상상인지 기억인지 헷갈렸다.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는 남은 소주를 급하게 털어 넣고 전철을 탔다. 그때부터 나는 양갱에게 오늘이 어제였으면 좋겠다는 둥 오늘 하루만 더 있으면 너무 위로가 될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질척거렸다. 양갱은 남자친구와 약속도 있고 다음에 또 꼭 오겠다며 나를 달랬다. 실랑이를 벌이다 지친 나는 뒤돌아 눈물을 쏟으며 지하철을 타러 갔다. 양갱에게 계속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양갱도 야속했다. 나는 오늘 너무 힘들었고 외로웠는데 또 외로워졌다고 생각했다. 외로운 나를 마주하게 된 이유를 양갱 탓으로 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서촌계단집에서 했던 서울이 좋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양갱과 있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오늘 낮에 겪었던 설움도 그동안의 팍팍한 서울살이도 양갱과 있어서 괜찮았을 테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만나 헤어졌던 애인들이 생각나고 나는 또 혼자 자야 한다며 엉엉 울었다. 한 친구에게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 양갱이 운다는 문자를 받을 때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문자를 받고 바로 영상통화를 걸었고 양갱은 '아리야 미안하다'라는 글자를 화면에 띄워놓고 울고 있었다. 나는 더 울었다. 영상통화에 참여한 다른 친구 2명이 최근 들어 가장 재밌는 장면이라며 계속 웃었다. 캡처도 하고 인스타에도 업로드했다. 나와 양갱은 그러는 중에도 이유를 모른 채 울었다. 왜 우냐고 묻는 친구들의 말에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아마 20살 그날에도 조디 옆에서 그렇게 울었을 것이다. 술에 취해 혀가 꼬인 채 두서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서로만 서로를 이해했을 것이다. 술에 취하면 이유도 모른 채 같이 울어버리니까. 그러니까 8년의 공백도 중요하지 않았다. 7살 때부터 12살 때까지, 20살 때부터 31살까지 나눈 비밀과 고민과 슬픔이 무수하기 때문일까. 둘 사이에 술 몇 병만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깊이 동고 하는 친구가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우리 같이 울었잖아."

너무 외로울 때 양갱이 서촌계단집 이야기를 내게 또 해줬으면 좋겠다. 우리 같이 울었다고. 혹시 또 8년 동안 못 보게 되더라도,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변하더라도 이 한 마디면 양갱을 알아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날 헤어지며 또 같이 울었으면 좋겠다. 왜 우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할 정도로 생각 없이 같이 울고 나면 금세 또 씩씩해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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