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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다고래 Sep 12. 2023

Hey, 너 여자야 남자야?

대출은 많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치앙마이에서 맞이하는 첫 불금. 한국이었다면 본투비 집순이답게 퇴근과 동시에 온라인 세상과 연결을 끊고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파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치앙마이다. 아무리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지만 해외에 나온 것 아닌가. 칼퇴를 하고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공사 중인 인도와 무단횡단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도로를 뚫고 여차저차 문 닫기 직전인 통신사에서 유심칩도 겨우 사고, 필요했던 생필품도 샀다. 이제 급한 일도 끝냈으니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동네 구경을 하다가 추천받은 재즈바도 가볼 요량이었다. 통신사를 찾는데 시간을 허비한 탓에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대충 아무 식당에서 저녁을 때울 생각으로 눈앞에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갔는데 식당은커녕 어쩐지 썰렁한 분위기에 겁이 난 나는 볼트를 얼른 켰다. 순식간에 내면의 겁쟁이가 과잉 활성화 된 나는 치앙마이의 유명한 대형 쇼핑몰을 목적지로 설정했는데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모든 차량이 바쁜 상태였다. 오토바이보다 지금 이 동네가 더 무서웠던 나는 바로 오토바이를 불렀다. 곧이어 기사가 배정되었는데 이번 기사는 내게 말을 걸었다. 내 위치를 못 찾는가 싶어 채팅창을 열어보았다.


 Hey, Are you woman or man? 응? 교통수단 타겠다는데 성별을 왜 알아야 하는 거지? 30여 년 동안 쌓인 이상한 인간 빅데이터가 즉각적으로 적신호를 보냈다. 그래도 족히 20분은 쩔쩔매다가 잡은 유일한 택시였다.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걸 왜 물어보는 건가요? 성별에 따라서 뭔가 달라지나요?' 라고 답장을 보냈다. 기사는 바로 내 말을 읽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1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는 'Okay.' 라고만 했다. 그는 내 현재 위치를 알고 있고, 3분 후면 도착한다. 정말 이상한 인간을 만났다고 해도 여기는 문 연 가게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나의 빅데이터를 믿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면 나만 손해니까. 큰 도로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하며 택시 요청을 취소했다. 사람이 많은 쪽에서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새로 택시를 잡아 대형 쇼핑몰로 향했다. 택시 기사가 이상한 곳으로 가지는 않는지, 구글 맵으로 나의 현재 위치를 계속 확인하면서. 볼트의 프로필 사진과 동일한 인물임을 확인하고, 평점을 확인하고, 그의 핸드폰 배경화면에서 가족사진을 확인했다. 여성 손님을 대하는 것이 아닌, 그저 A포인트에서 B포인트로 데려다주고 돈을 받을 손님을 대하는 적당히 무관심한 태도에 안심이 됐다.


 푸드코트에서 배를 든든히 채운 나는 올드타운의 재즈바에 갈 의욕은 잃었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 열리는 야시장 구경은 할 정도의 용기를 다시 얻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기도 하지 않은가. 곳곳에는 기타를 든 버스커들이 노래를 부르고, 야시장에서 파는 간식거리와 맥주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좀 전의 일은 잊혔고 버스킹 공연을 동영상으로 담으며 노래에 빠져들고 있었다. 혼자 여행 온 여성 관광객은 함부로 긴장을 늦추면 안 되었던 것일까. 곧 Hey, Hey! 하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워낙 사람이 많아 나를 향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 처음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사이, 그는 더욱 크게 목소리를 높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술에 취한 것인지, 얼마 전 합법화된 대마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금방 전에 느꼈던 터질 것 같던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다시 한번 군중 속으로 도망칠 차례였다. 꼬치를 사러 줄 서 있는 수많은 사람 쪽으로 걸어가 나도 꼬치를 사려는 것처럼 줄을 섰다.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계속 쫓아왔고 연신 나를 불렀다. 마침 남자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바다 건너 있어서 지금 당장 와줄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에게 이상한 남자가 계속 쫓아온다며 너무 무섭다고 토로했다. 남자친구 목소리를 듣자 금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당장 낯설지만 익숙한 숙소로 들어가 아무도 못 들어오도록 문을 잠그고 싶었다. 문제는 나는 엄청난 길치고, 집까지 가는 길을 모르고, 지도 앱을 확인해야 하는데 무서워서 전화는 끊을 수 없고, 에어팟도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남자친구 목소리를 듣자 마지막 남은 이성까지 날아가버리고 겁에 질려 사고가 멈춘 것 같았다. 남자친구는 집에 가는 게 가장 우선이니, 일단 진정하고 전화를 끊고 구글 맵을 켜라고 했다. 이미 내가 있는 곳과 숙소 위치를 알고 있는 남자친구는 가는 길도 모두 큰길이고, 아주 가까우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갑자기 생존본능이 십분 발휘된 나는 그의 말대로 차분히 구글 맵을 켜고 빠른 걸음으로 큰길을 따라 뒤를 힐끔힐끔 확인하며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날 나를 처음 숙소에 안내해 주던 젊은 경비원의 얼굴이 보이자 그제야 안도감에 꽉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다음날 아침에는 이상한 사건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로비에 나갔더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백인 남성이 경찰과 대치한 채 입구를 점유하고 있었다. 살면서 바바리맨은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그렇게 대낮에 발가벗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깜짝 놀라 순식간에 얼어붙은 나를 다행히도 청소하시는 직원분과 경비원 두세 분이 발견하고 다른 층의 비상구를 알려주셔서 도망치듯 나왔다. 직원분들은 영어를 못 하시고 나는 태국어를 못해서 늘 번역 앱을 사용해야 했는데, 로딩을 기다리는 찰나 동안 식은땀이 얼마나 났는지 모른다. 짧은 시간이기는 했으나 나는 분명 화난 백인 남성이 언성을 높이며 했던 말도 모두 듣고 이해했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고 희뿌연 필터가 씌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호한 느낌으로 남았다. 되려 이 일을 생각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그때 온갖 바디랭귀지를 동원해서 로비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쪽으로 숨을 수 있도록 알려주었던 직원분의 걱정 어린 눈동자다. 도망치듯 나와서 택시를 타자마자 택시기사에게 로비의 미친 남성에 대해 말하며 이런 사건사고가 많냐고 물어봤는데, 그 역시도 별 일을 다 본다는 눈치였다. 


 지난 10년 동안 남자친구와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더니 혼자 여행할 때 느끼는 두려움을 잊고 지냈다. 공격적인 상황을 맞닥뜨려도 언제나 믿을 구석이 있는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혼자 갔던 호주, 방콕 모두 아주아주 늦어도 8시면 숙소에 들어가느라 바빴다. 혼자 여행 다니는 여성 중 누군가는 나처럼 낮의 단면만 보며 아쉬움을 달랬을 것이다. 이상한 일을 연달아 겪은 초반 며칠 동안 처음 느낀 재즈바의 즐거움이 온몸을 가득 채울 때에도, 골목골목을 탐방하며 이것저것을 발견하고 기쁠 때에도 무섭지 않은 적당한 시간에 떠나야 한다는 강박이 늘 깔려있었다. 그럴 때마다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걸어가던 한 백인 남성을 떠올리며 부러워했다. 키가 190은 족히 되어 보였고 나시 바깥으로 보이는 팔은 두껍고 강해 보였다. 늦은 밤까지 재즈를 듣고 즐겁게 집에 돌아가도, 혼자 예뻐 보이는 골목길을 휘젓고 다닌다고 해도 누가 함부로 시비를 건다거나 해하려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괜히 위축되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다닐 일도 없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남성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가 되어 밤늦게, 그날 한 만족스러운 여행을 되짚어보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설렁설렁 숙소로 걸어가는 몽상에 빠져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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