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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다고래 Jan 23. 2024

1004번 도로

대출은 많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1004번 도로는 아니다


 작년 여름, 치앙마이에 처음 왔을 때는 '님만해민'이라는 동네에서 한 달을 지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치앙마이에서 지내본 경험이 있는 전 직장동료분이 치앙마이가 처음인 여성 혼자 여행하는 경우 가장 무난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라고 추천해 주셨기 때문에 깊은 고민 없이 숙소를 덜컥 잡았다. 치앙마이 한달살이 콘텐츠에서는 님만해민을 서울의 가로수길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가로수길에 즐겨 가지 않아서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힙한 바와 카페가 즐비하고 비싸고 좋은 숙소가 많은 곳이다. 도로도 제법 넓고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속된 말로 새삥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물론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도 차고 넘친다. 오토바이나 자동차로 이동하는 현지인들과 다르게 나를 포함한 많은 외국인들은 님만해민의 여기저기를 걸어서 탐험하고 다닌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는 걷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나 혼자 땡볕 아래 걷고 있으면 오토바이가 쌩쌩 소리를 내며 지나다닌다. 외국인이라고 해도 장기 거주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오토바이를 렌털하여 운전하고 다니는 편이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 했던가.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님만해민에서는 걷는 내가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혼자 걷다 보면 종종 현타가 온다. 그래도 5분, 10분 거리를 오토바이 택시를 불러서 가는 것은 왠지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고집스럽게 걷곤 한다. 거리도 님만해민만큼 넓거나 깨끗하지는 않다. 대신 여기는 곳곳에 들어서 있는 노점에서 맛있는 국수나 커피, 과일을 먹을 수 있고, 어딘가 부족한 것 같은데 푸릇푸릇한 식물로 가득 찬 카페 겸 이터리에서 느리게 브런치를 먹으며 일을 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다. 태국인들이 오토바이 세차를 하거나 밤마다 좋아하는 샤브샤브며 무카타를 먹는 것도 볼 수 있고, 영어가 더 잘 통하지 않으니 주워듣고 배우는 태국어도 많아진다. 5분만 걸어가면 매일 열리는 커다란 시장도 있다.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밥을 먹을 만큼 용감하거나 시장 구경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님만해민과 지금 동네를 비교하자면 지금 살고 있는 우리 동네가 좀 더 마음에 든다.


 새로운 동네에 적응도 하고 저번에 거의 가보지 못했던 핑강 근방이나 치앙마이 남쪽 동네도 구경하느라 님만해민은 돌아오고 나서도 꽤 나중에 가보게 되었다. 한 번쯤 갈 법도 한데 발길이 잘 가지 않은 탓도 있었다. 님만해민에서 지낼 때조차도 주로 시간 보내길 좋아하는 곳은 올드타운이나 지금의 동네였는데 낮에 일하거나 조용히 책 읽으면서 시간 보내길 좋아하는 내게 잘 맞았다. 너무 힙한 나머지 의자나 테이블이 말도 안 되게 작다거나 외국인들이 짧게 들락날락하는 장소들은 멋지기는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 도착하고 나니 묘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작 살 때는 꽤나 헤매고 다녔으면서 왜 골목 구석구석까지 기억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 여기로 이렇게 가면 판 아저씨네 식당이 나오고, 이쪽은 고기국숫집이랑 과일 사 먹으러 가는 길, 퇴근이 늦어서 저녁 못 먹으면 여기 갔었는데 따위의 생각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장소나 가는 법만 떠오르다가 이내 그 여름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바들바들 떨면서 처음으로 외국인 브런치 모임이나 글쓰기 모임을 하러 가던 길, 처음 공연을 보고 기분 좋게 돌아오던 달뜬 밤, 게으르게 일어나 휘적휘적 노트북을 지고 일하러 가던 날들, 퇴근하고 간 요가수업에서 위로받았던 날, 앙깨우의 노을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모기에 잔뜩 물렸던 것, 친구와 나눴던 따뜻한 대화, 그때 네가 지었던 수줍은 미소. 그런 것들 하나하나 더듬다 보니 참 웃기게도 그리워져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매번 건널 때마다 무서워서 불평하던 1004번 도로, 숙소 가는 길 앞에서.




 성인이 되고 어쩌다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곧잘 '죽어도 고등학교 시절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난 그리운 게 하나도 없어.'라고 단언했다. 살면서 거의 모든 것이 불확실 덩어리처럼 느껴지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고등학생이라면 모두 그렇겠지만 내게 고등학교 시절은 10대 후반의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워낙 긴장을 많이 하는 타입인지라 시험 기간만 되면 뭘 제대로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고 시험이 끝나면 빼놓지 않고 심한 몸살이나 위염으로 드러눕곤 했다. 특히 수학 시험은 생각만 해도 최소 일주일 전부터 매일 헛구역질을 하게 했는데, 세수를 하면서 눈물이 뚝뚝 흐르거나 옆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신경이 예민해져서 죽어나갈 것 같았다. 이 지경인데도 공부를 아예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일단 다른 선택지에 대해 아예 생각도 못해봤고, 공부를 잘해서 뭐라도 되면 어려운 집안 사정도 해결할 수 있을 줄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과가 나쁘진 않았다. 머리가 비상하진 않아도 등수는 꽤 상위권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위에 기술한 스트레스 상태로 3년 내내 어떻게든 상위권에 붙어 있어 보려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학원이나 과외의 도움을 받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는데 정신력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핑계만 댄다는 핀잔에 열등감도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매일 자책하고 작아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꽤 귀여운 기억도 있다. 그중에서 가장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은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전쟁 중에도 아이를 낳고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게 인간인지라 신경과민인 나에게도 몇몇 남자아이들이 무려 고백을 한 것이다. 늘 상상만 해오던 풋풋한 연애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바보같이 다 걷어차버렸다. 이유는 더 어리석다.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체 어떤 호르몬 덩어리 사춘기 청소년이 저런 이유로 연애를 마다한단 말인가. 그렇게 꿈에 그리는 첫사랑 스토리도 만들어 보지 못한 채 수능을 봤지만 결과는 목표했던 만큼 좋지 않았고 재도전의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당연히 고등학교는 내게 어둠의 시절로 남게 되었고 남은 인생의 단 하루라도 그때로 돌아가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다. 얼마 전,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고등학교 시절이 그리워졌으니 말이다. 생일이 며칠 남지 않은 하늘에게 우연히 질문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하늘, 너는 친구와 생일을 축하하는 타입이야? 아니면 가족과 축하하는 타입이야?"

 "나는 사실 혼자 조용히 보내고 싶어. 내가 살아온 시간, 내 몸이 괜찮은지 돌아보면서. 그런데 생일은 나만의 날이 아니잖아. 엄마가 살면서 가장 큰 고통을 겪으면서 나를 낳은 날이니까. 그래서 보통 가족하고 밥 먹으면서 그날 엄마가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어드려. 너는 어때?"

 

 너는 어때. 고백하건대 나는 내 생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생일을 제대로 챙긴 기억도 없었고, 나의 '태어남'이 축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조금 슬픈 날이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생일이어서 기쁘다고 느껴본 것은 고등학교 1학년때였다. 그때 우리 학교에는 심화반이라는 상급반이 따로 있었다. 서로 다른 반이어도 주요 과목도 함께 수업 듣고 야간 자율 학습도 매일 한 교실에서 모여서 하다 보니 제일 친한 친구들이 모두 심화반이었다. 17번째 생일도 그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피곤한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수업을 듣고 몰려 가서 밥을 먹고 하기 싫은 야자를 하러 가는 여느 날과 다를 바 하나 없는 날이었다. 야자 시간 전까지는 말이다. 별생각 없이 교실에 들어서는데 반짝거리는 풍선 몇 개와 생일 케이크, 생일 축하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분명 기뻤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세세한 사항이 떠오르지 않는다. 부끄러운 듯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어색해하는 나를 보더니 초나 빨리 끄라며 츤츤거리던 목소리. 웃는 얼굴로 축하해 주던 친구들의 모습. 매일, 하루종일 입고 있었던 교복. 그런 것들이 조각조각 남아있다. 처음으로 받아본 떠들썩한 생일 축하였다. 아, 생일은 제법 좋은 건가 보다, 라고 느꼈다. 그날 집에 풍선과 케이크를 가져가니 아빠는 대체 저게 뭐냐고 물어봤다. 쑥스러워서 대충 얼버무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 같다. 아빠, 누가 생일이면 이렇게 축하해 주는 거야, 라고 대답할걸.




 이러나저러나 아직도 고등학교 시절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힘들고 괴롭고 혼자인 것 같은 막막함, 그렇게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나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했던 마음, 숨도 못 쉴 것 같이 무거웠던 압박감을 떠올리면 그때의 헛구역질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그때 처음으로 생일은 좋은 거라고 알려주었던 친구들이 그립다. 부끄러워서 고맙다고 충분히 말하지 못하고 민망해하던 내가 그립다. 매일 밤 함께 모여서 몰래 간식을 까먹고 드라마를 보고 미래를 두려워하고 문제집을 풀던 그때의 우리가 그립다. 이제는 같은 시간을 함께 통과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 알아버렸으니까. 지겨우리만치 매일 같은 장소를 가고, 매일 같은 풍경을 보고, 매일 같은 너를 만난다는 게 실은 대단한 일이라는 걸 몰랐다.


 비행기를 여섯 시간이나 타고 와서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 앞에 멀뚱히 서서야 마음에 쏙 들지 않았어도 그리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17살 생일, 활짝 웃던 친구들의 얼굴을 좀 더 선명하게 그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지금은 다들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생일 축하는 잘 받고 있는지 알고 싶다. 나도 그들의 생일을 다시 한번 챙겨줄 수 있다면, 하고 오래도록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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