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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Mar 24. 2017

미스 슬로운, 평범한 엔젤을 지워버린 완벽한 빌런

'설명'과 '계도'의 생략

한국 영화가 한 편 개봉한다고 치자. 자, 그럼 이제 죽음의 Yes or No 게임을 시작해보지. (씨익)




조폭이 주인공인가? -> No

경찰이 주인공인가? -> No
(사실 이른바 ‘조폭이랑 경찰’ 영화는 이제 좀 시류에서 밀렸다. 요새는 뭐니 뭐니 해도)

그렇다면 검사가 주인공인가? -> No

(검사지! 암!)

오.. 그럼 황정민 배우가 나오나? -> No

아니 그럼 이경영 배우…? No!




사실상 이 마지막 질문까지 오는 한국영화는 거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왔다면.



남자 주인공 원탑 혹은 투탑인가? -> …YES!



그렇다. 게임은 끝났다. 위올 다이. 일명 GG.



왜 이런 헛소리들을 글의 서두부터 늘어놓느냐면, 다 장난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틀린 말은 없기 때문이고, 이 죽음의 게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영화 한 편을 관람하고 나온 터라 다소 ‘신나 있어서’ 그렇다. 아, 물론 한국 영화는 아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괜찮은 영화의 매직넘버 쓰리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넘버 원. 초 천재 여자 원탑이 누비고 다니는 초연 독무대

‘미스 슬로운’은 매우 유능한 (=아마도 워싱턴 DC에서 제일 똑똑한) 로비스트가 주인공이다. 제목과 포스터에서 뿜뿜하고 있듯, 놀랍게도 여성이다. 그녀는 총기규제 강화에 찬성하는 입장인데, 자신이 속해있는 최고의 로비회사가 총기 옹호 편에 서자, 미련 없이 상대편 캠페인을 진행하는 작은 로비회사로 입사한다. 선거 캠프와 다를 게 없는 이 쪽 생리에서, 당연하게도 소규모 회사는 승리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보통 정말 ‘잘난’ 사람들은 가능한 것보다는 ‘불가능한 것’에 피가 펄펄 끓기에, 우리의 주인공은 진짜 이기려고 한다.




자, 이쯤만 살펴봐도 ‘뭐지? 로비? 그거슨 사과박스에 5만 원 권 꽉꽉 채워 갑님에게 전달하는 뭐 그런 거 아니었나?’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부끄럽게도, 내 수준이 그 정도다. 일단 로비스트는 그냥 다 ‘그분’ 같은 줄 알았는데 (내가 아는 유일한 로비스트…. 막 선글라스… 내 코트가 한  벌에 1억 5천이야……) 이런 숨겨진 ‘전략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구 상에 상업영화 시장이 꽃핀 이래 수많은 영화가 쏟아져 나왔지만 미국식 정치 시스템에 기반한 로비계의 생리 혹은 로비스트라는 직업에 대해 이토록 명쾌한 하나의 테마(총)로 풀어낸 영화가 있었나 싶다.




따라서 공연으로 치자면 2017년 초연인 창작극인데, 심지어 여자 주인공이고, 전체 씬에서 99% 이상을 가져가는 사실상 1인 독무대 공연이다. 여성 독무대 영화는 지금껏 몇 작품 있긴 했지만 몸이 아닌 ‘머리 쓰는’ 여자는 처음이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똑똑하긴 하지만 주인공의 후배, 혹은 선배, 혹은 사무관, 혹은 동생, 혹은 배우자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만 보아왔던 한국 관객들에게 잠시나마 갈증을 해소해 줄만한 영화 임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검사는 아직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한국영화에서는 검사만 이만 오천명은 본 것 같다. 그래서 남자 검사의 사무실은 눈 감고도 그리겠단 말이지. 어째 서울지검이 내 사무실보다 더 친근하다. 어차피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직업을 가진 사람을 주인공으로 할 거면 로비스트 이런 거 하면 얼마나 좋아. 선악과에 손을 대고 만 아담과 하와처럼, 한 번 새로운 맛을 보니까 더 욕심이 생긴다. 이제 정말 다른 것 좀 보고 싶다.







넘버 투. 대의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하여 던지는 물음표

사실 이 영화는, 주제는 다소 어렵고 무겁지만 전체적으로 영웅적 서사 (잘 나가는 주인공 – 도전 – 작은 성공 – 대따 큰 시련 – 불쌍불쌍 – 극복)를 띄고 있는 오락영화이기 때문에,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오션스 일레븐 타입의 범죄 오락영화처럼 연출된 이 영화를 보고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오바마 캠프의 선거전략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느꼈던 순수한 놀라움과 일종의 무력감이 오랜만에 다시 떠올랐다. 선거의 본질적인 의미는 ‘나’의 의사를 가장 잘 주장해줄 수 있는 사람을 충분히 알아보고 그 사람에게 내 한 표를 던지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선거는 존재할 이유가 없이 그냥 로또 뽑듯이 뽑으면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주권자’가 ‘후보’를 뽑는 게 아니고, ‘오바마’에게 ‘국민들’은 전략적으로 타케팅 당했다. 이건 거의 ‘hunting’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내 편이 될 확률이 높은 사람들은 더 확실히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당선 확률이 거의 없는 주의 경우 과감하게 버렸다. 선거는 더 이상 주권자의 순수한 의사표현이 아니고 (요새 이런 말 하면 바보 취급당한다) 정확하게 계산된 힘의 논리와 공학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게임이다.




미스 슬로운 속에 등장하는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역구 시민들의 의사를 대변하고 그들에게 표를 받기 위해 의정활동을 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로비스트가 선사하는 당근에 현혹되거나 혹은 협박에 굴복했다. 나를 지지해 준 유권자들이 총기 규제 법안을 옹호하는지 반대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초선에 도전하는 내 아들의 당선이 더 중요했다. 이때 로비스트들의 몇 수 앞을 내다본 이른바 ‘전략’은 다소 비인간적이고 비 윤리적이며 불법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 또한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주권자에게 권리를 위탁받은 자가, 자기가 주인인 줄 착각하는 순간 어떤 결과가 돌아오는지를 이 영화의 뒷부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그녀가 얼마나 ‘넘사벽 완전체’인지 통쾌하게 보여 주기 위해 꾸며진 장면으로, 이런 시사점을 던져주기 위한 의도는 전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제발, 우리의 소중한 권리를 위임받은 자들이여, 잘 좀 하자. 라고. 자꾸 그렇게 할 거면 그냥 내가 퇴근하고 여의도 가서 직접 입법할랑게.

 









넘버 쓰리. 주인공을 ‘상식’의 틀에 가두지 않는다는 것.

이 영화가 내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주인공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녀를 바꾸려 하지도 않고, 소위 말해 ‘회개’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부분이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이 영화의 정반대 편에 서있는 영화들만 만들어졌을 때 ‘관객이 침해받는 선택의 자유’라는 영역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은 자고로 이러이러해야 하고, 비록 시작은 빌런일지언정 마지막엔 반드시 정의의 편에 서야 하며, 우리 애가 처음부터 이런 애는 아니었는데 블라블라 등등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놈의 ‘정의’ 그리고 ‘상식’이라는 포장지 말이다. 듣기 좋은 얘기도 한두 번인데, 한국에서 개봉하는 그리고 영화 시간표를 장악하는 이런 영화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피로도가 너무 심할뿐더러 가장 치명적으로는 영화가 ‘예측 가능’해져 버렸다.

 



청문회장에서 마지막 발언을 하는 미스 슬로운의 고해 비슷한 대사 몇 줄을 바라보며, 속으로 ‘설마.. 설마.. 제발…’을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그녀의 유년시절이 플래시백으로 촤라락 펼쳐지며, 너무 똑똑해서 보통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었던 순간들. 혹은 그녀는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너무 뛰어난 IQ 탓으로 아이들에게 외면당하던 순간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불법적으로 총기를 소유한 괴한에게 습격당한 그녀의 엄마의 모습….. 아예 화면 커트까지 예상될 정도로 너무나 예측 가능한 흐름. 정말, 정말, 다행히도 이 빌어먹을 플래시백은 단 한 커트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 주인공을 설명하려 들지 않은 것이다! 하늘이시여!




같은 맥락에서, 그녀를 자꾸 일깨우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하지 않는 그 쿨함도 너무 멋있었다. 영화 상에서, 모든 수를 전부 꿰뚫어 보는 그녀의 우주가 놓친 수는 단 두 가지다. 다소 비인간적이지만 승리를 위해 꼭 필요했던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팀원에게 일종의 커밍아웃을 시켰고 이로 인해 돌아온 끔찍한 나비효과 하나. 그리고 그녀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어떤 남자의 결정적인 위증. 보통은 이런 두 사건을 통해 주인공은 ‘바람직한’ 인간관계와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영화의 3/4 지점에서 갑작스러운 자기반성 및 화해 테크를 순식간에 타게 된다. 사십 평생을 이 사건 이전 시점으로 살아왔지만 갑자기 이 영화 속의 시간에서 인간성을 확보하게 되는 주인공. 하하하하. 다소 말은 안 되지만 감독이나 배우, 관객 등 Player 모두가 적당히 마음은 편할 수 있는 전개. 물론 그런 전개에 투자가 더 잘되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거 없다.



'다 X까. 일이 잘 안되면 내 방법대로 한다. 사실 내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눈 하나 정도는 깜짝했지만 나에게 더한 영향을 미칠 순 없어. 단지 너네한테 좀 미안하고 고마운 건 있으니 내 한 몸을 불살라서라도 이 일은 내가 해결한다.'



진짜 존멋. 카리스마 철철.





그렇다. 바로 이런 점이 좋았다. 변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 주인공이 변하지 않아도 충분히 스릴 있고 긴박하며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모든 사람이 특정한 ‘타입’으로 자라난 이유가 명확할 수 없고, ‘사람’이라는 유기체를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 극작품들의 강박이자 난센스였을 수도 있다. 나아가 모든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수많은 극에서 인간을 너무 특정 짓고 설명하려 했다는 것이 놀랍고, 이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고 하겠다.




아 물론, 부패검사였다가 억울한 피의자 한 명으로 인해 정의의 사도가 되거나, 속물 변호사였지만 인생을 뒤흔들만한 사건으로 가치관이 통째로 뒤바뀐 이야기도 필요는 하다. 이런 이야기가 재미없고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세상만사 적당히’라는 정말 적당한 표어가 존재하지 않는가? 관객의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측면에서, 제발 주인공을 ‘설명하지 않는’ 영화가 많이 나오길.










그녀는 비록 ‘변하진’ 않았지만 더 ‘강해’ 졌다. 변하는 것과 강해지는 것 사이의 간극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것은, 99%의 전투력을 가진 그녀가 무기를 전부 버리고 갑자기 ‘평범한’ 엔젤이 된다는 것 VS 나머지 1%의 경우의 수까지 겸비하여 100%의 ‘완벽한’ 빌런이 되는 것 정도의 어마어마한 차이인 것이다.   




‘미스 슬로운’은 가히, 영화를 보는 중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지만 영화를 관람하고 난 뒤 미뤄뒀던 이 영화의 세계관을 계속해서 이해하게 만드는 작품이며 제시카 차스테인을 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과물이다.  






(+) 사실 마지막 질문은 이거다.


'재미있는가?'


따라서 이 게임의 생존자는 '조폭, 경찰, 검사, 특정 배우들, 남자주인공이 안 나오면서 재밌는' 영화이고, 미스 슬로운은 몇 안되는 생존자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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