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하는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

휴직의 좋은 점 일곱 - JLPT N1 성공기

by 줄리


마지막으로 휴직의 좋은 점에 대한 글을 쓴 게 지난여름이니까, 벌써 두 계절을 지나 겨울의 끝자락이다.

아주 오랜만에 휴직의 좋은 점이 번뜩! 떠올라서 글을 써본다.




나는 평소에 일본어를 좋아하는 편이다. 일본문화도 아니고, J-POP도 아니고, '일본어'를 좋아한다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이 표현이 정확해서 다른 표현을 하기는 좀 어렵다. 영어가 아닌 제2의 언어를 그 나라의 네이티브 수준으로 하면서(물론 그 정도 실력은 안 됨) 말하고, 생각하고, 의사소통이 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비록 일본 및 일본어와 아~~ 무런 상관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정말 단순히 취미의 영역으로 즐기고 있다.









20년 전: 일본어 짝사랑의 시작(라고 쓰고 구오빠 사랑기라고 읽는다)

이전 글에서도 서술한 바 있지만 나의 일본어 사랑은 덕질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별생각 없이 일본어를 선택 후, 그 재밌다는 '일드'(일본 드라마)에 눈을 떴다.


2000년대 즈음의 일드는 정말 말 그대로 신드롬에 가까웠고, 요즘 세계 어디서든 K-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그때는 모두가 일드를 볼 때였다. 그러다 만나버린 것이다.


일본잡지 앙앙 피셜, 15년 연속 안기고 싶은 남자 1위, 기무라 타쿠야, 그를. (두둥)



놀랍게도 책상에 실제 붙여 놓은 그 사진




세상에 저렇게 멋있는 남자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게 한 남자.

고3 때 'ㅇㅇ아, 대학 가야지?'라는 말풍선과 함께 인화한 사진을 독서실 내 자리에 붙이게 한 남자.

그 사진 때문에 아재 선생님의 효자손으로 등 깨나 맞았지만 수능 끝날 때까지 절대 떼지 않았던 그 남자.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도대체 저 오빠가 뭐라고 하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같은 드라마를 10번씩 돌려보게 한 그 마성의 남자!!



그러니까 내 일본어 사랑은 결국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알고 싶어서 시작된 덕질의 부산물이라는 것.

그냥 한글자막 보면 되는 거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첫째로, 자막은 어느 정도 의역해서 제작되기 때문에 정확한 일본어 대사라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일본어로 '얘, 바보 아냐?'라고 해도 자막은 '이 자식 뭐야' 혹은 '형편없군' 등등으로 번역되기에 '오빠'의 말투나 습관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두 번째는... 실시간으로 방영 중인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자막이 올라올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다 (ㅠㅠ) 재능 기부로 자막 만드는 사람도 물리적으로 최소한 0.5일~하루 정도의 시간은 있어야 자막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본방 후 아무리 빨라도 하루는 더 기다려야 했다.


요즘처럼 OTT에서 실시간으로 드라마를 보는 세상에선 상상하기가 힘들지만, 그땐 그랬다.


결국,

1) 너무 멋있는 오빠가

2) 뭐라고 하는지

3) 실시간으로 알고 싶어서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엄청난 양의 언어 공부를 미쳤다 싶을 정도로 반복한 건데, 그땐 그게 공부인지도 몰랐다. 하, 헐리웃 배우나 영국 배우를 좋아했으면 미드나 영드에 미쳐서 영어를 진짜 잘했을 텐데. 후회도 살짝 된다. 기무라 오빠, 당신은 왜 일본인인가요.





10년 전: 일본어 시험이 있다던데?

그렇게 구오빠가 출연한 모든 드라마 전 회차 X 10회 반복 및 구오빠의 예능 '스마스마' 실시간 마스터 등의 공부 같지 않은 공부를 거치며 난 나도 모르게 능력자가 되어있었다.(?)


저요?


뭐랄까.. 이 정도까지 되길 바란 건 아니었어라는 느낌이랄까. 그냥 언젠가부터 자막 안 봐도 무슨 소린지 알 것 같고, 자막 없이 예능 보면서 웃기 시작했다.

그땐 뇌가 말랑말랑해서 진짜 흡수를 잘한 것 같다. 아, 옛날이여.


그러던 어느 날, 일본어능력시험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은 초중고에서 보는 시험, 수능시험, 대학교 시험, 자격증 시험, 영어 시험, 취업시험.... 등등 다 봐야만 해서 보는 시험만 봤었다. 단 한 번도 내가 보고 싶어서 본시험은 없다. 다 must여서 본 거지, want가 없었던 거다. 그런데 일본어 시험이라?


원래 시험을 보려고 시작한 공부는 아니지만 뭐든 자격증은 따놓으면 좋은 거니까, 함 봐볼까? 싶어서 보게 된 일본어능력시험(JLPT) N2(2급). 딱히 다른 공부도, 학원도, 문제집도 풀지 않은 채 그냥 드라마 만렙 나 자신만 믿고 보러 간 그 시험.


그런데 떡하니 붙어버렸다?


와, 이거 별거 아니네?

라는 건방진 생각에 휩싸여 1급(N1)도 있다던데 바로 봐도 되겠는데? 싶었다.

바로 다음 시험에 N1 응시 후 결과는?

당연히 보기 좋게 똑 떨어짐.


N1은 뭐랄까 N2랑은 아예 체급이 다른 느낌이었다. 시험 보는 중에 이미 나의 불합격을 예상할 정도였다(ㄹㅇ붙어도 이상할 정도의 찍기 행진이었음). JLPT는 언어지식, 독해, 청해 등 3가지 파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언어지식을 푸는 동안에는 '도대체 이게 외계어인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이 정도의 심정이었다.


사실 저렇게 대충 공부한 것처럼 쓰여있지만, 거의 10여 년의 세월 동안 보고 들은 시청각 자료의 양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독학도 조금씩 했기 때문에, N2는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N1은 아예 차원이 다른 난이도였다.


그때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제대로 다시 한번 공부해서 N1을 딸 것인가, 그냥 여기서 멈출 것인가.

대학 입시도, 취업에도, 생계에도 아무런 영향이 없는 이 시험을 내가 굳이 볼 의미가 있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난 '못 먹어도 Go'를 선택했고, 종로 파고다의 족집게 쌤을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제대로 일본어라는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느낀 건 '배울수록 어려운 언어'라는 거였다. 남들이 저런 소리할 땐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내가 직접 해보니까 체감이 됐다. 게다가 시험합격용 공부를 하자니 죽을 맛이었다. 멋진 기무라오빠의 목소리도 화면도 없이,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학습용 듣기 예제는 '나는 어디, 여긴 누구'라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난 그냥 재밌게 일본어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이런 강의실에 들어와서 저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에게 혼나며 단어를 외우고 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때아닌 수험생활을 하며 순간순간 포기할까 싶은 순간이 수없이 있었지만,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채라도 썰어야지 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버텼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자의로 하고 싶어 했던 공부이니 조금만 참고 해 보자 다독이면서.


인고의 세월은 날 배신하지 않았고 결국 다음 시험에 N1에 합격했다. 그렇게 산왕전에서 모든 걸 불태웠던 북산처럼 난 일본어를 완벽히 잊었다.


산왕만큼이나 빡셌던 N1....






그리고 지금: 그 시험을 다시 본다고?

사실 팔자에 없는 수험 생활을 하면서 일본어에 대한 열정과 흥미가 기무라 오빠의 노화와 맞물려 빠르게 사그라들었던 것 같다. 그저 취미생활이었던 일본어가 공부/시험/자격증의 영역이 되자 약간 정이 떨어졌고(ㅋㅋ..) 결정적으로 N1에 최종 합격하고 나니까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완전히 손을 놓게 되었다.


그렇게 일드도, 예능도, 쓰나미로 인해 일본 여행도, 오빠도 완전히 잊고 10년을 살았다. 그 10년 동안 내 최초의 취미생활은 잊은 채 회사생활만 열~~ 나게 했다.

그러다 결국 병이 났다.

그리고 휴직을 했다.


인생에서 거의 처음 쉬게 되니 처음엔 쉬는 방법을 몰라 많이도 헤맸다. 미뤄뒀던 여행도 다니고 못 읽은 책도 읽고 찜해 뒀던 드라마도 보고 나니 마음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일본어 생각이 났다. 쉬려고 하는 휴직인데, 그냥 쉬면 되는걸 뭘 또 이 나이에 공부를 하니 생각 안 한 것도 아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면 얼마나 빡센지 알기 때문에 고민을 정말 많이 했는데, 오랜만에 순수한 취미에 대한 갈망을 채워보자 라는 결론에 이르러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다시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 No.1 이니까.


ㅇ 학습 기간: 약 3개월 (9월: 슬공/ 10월: 걍 공/11월: 빡공)

ㅇ 교재: 해커스 JLPT N1 한 권으로 합격

- 어차피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여러 권을 다 풀 자신도 없어서 딱 한 권만 파기로 함

- 책 닉값 대로, 한 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웠고 문제집에 있는 문제 및 온라인 모의고사 다 풂

ㅇ 언어지식: 역시 언어는 안 쓰면 퇴화한다/드라마 병행 필수

- 초반엔 너무 오랜만에 머리를 써서 그런지 하나도 외워지지가 않아서 정말 힘들었음

- 나 이대로 빡X가리가 되는 걸까...? 고뇌의 시간들

- 까맣게 잊고 지낸 세월 플러스 야속한 뇌의 노화

- 완벽히 외우는 건 불가능임을 깨닫고 한자 부수 보고 음을 때려 맞추는 방법을 선택(writing이 없는 시험이라 가능!)

- 마냥 책 보고 때려 외우기보다는 드라마 같은 시청각 자료랑 병행하는 게 참 도움됨

: 예를 들어 책에 '동반자살'이 '무리신쥬(無理心中)'라는데.. 이게 도대체 먼 말이란 말임?

한자문화권 짬바로도 유추불가능. 근데 드라마 '언내추럴'을 보다 보니 '무리신쥬'라고 하더라고.

해당 회차 보고 바로 외워짐

ㅇ 독해: 사실상 국어빨

- 책에 있는 지문들 시간 정해놓고 진짜 시험처럼 풂

- 솔직히 독해는 지문 자체는 많이 못 풀었는데(단어 외우느라..) 그냥 국어빨이 절대적인 거 같음

: 원래 수능 국어 같은 장문 언어 문제에 강했기 때문에 많이 어렵지 않았음

- 예를 들어, 언어지식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짤 없이 틀리지만 독해 지문 속에서 나오면 앞뒤

문맥으로 파악하여 찍기 가능!

ㅇ 청해: 시험 유형의 파악

- 아무리 드라마 봐서 잘 들린다 해도, 시험 일본어는 또 다르므로 유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함

- 노이즈 있는 고사장 버전으로 틀어놓고 시험 시간에 그대로 맞춰서 풂

- 가끔 1.25배속도 했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음

- 이어폰으로는 절대 들으면 안 됨. 시험장에서 울리게 들리니까!!

ㅇ 종합(?): 드라마 히어로 시즌 1~특별판/극장판/시즌2 모조리 시청

- 가장 행복한 공부법. 공부 같지가 않음

- 책만 파는 공부 너무 재미없으면 중간중간 좋아하는 드라마 시청 시간 끼워넣기 추천

- 머리가 식는 느낌이지만 사실은 공부 중이라는 거





결과는?

180점 만점에 164점.

10년 전에 봤던 첫 번째 시험보다 점수가 더 높게 나왔다. 지저스.


생각보다 높게 나왔다



10년 전 시험 결과



아직은 내 머리가 쓸만하다는 인증을 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리고 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도전하길 잘한 것 같다.









이번 도전에 대한 소회

10년 전 시험 점수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언어/지식 파트는 이렇게 단기간 빡공으로 점수를 올리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시험을 보는 중에도 느꼈지만 애초에 JLPT 언/지는 문제은행식 출제가 아니기 때문에, 해당 파트 점수를 많이 얻기 위해서는 일상생활 속 공부가 중요하다. 단순하게 문제집 몇 개에 나온 기출/예상문제 달달 외우는 걸로는 만점이 불가능하고, 평소에 일본 방송도 보고, 신문도 보고, 사설도 읽고, 소설도 보고 해야 한다. 3개월 학습기간 동안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단어 외우기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집에서 외운 단어 하나도 안 나옴....ㅠ


참고로 내 독해는 국어빨, 청해는 구오빠빨이다. 솔직히 독해 성우가 그 오빠라면 다 맞을 수 있다.. 다만 그 오빠가 성우를 하지 않을 뿐이다.....


10년 후에는 40대인데 그때도 한 번 또 도전해 보고 싶다. 할 수 있을까?


여하튼 결론은

다른 나라 말을 알아듣고, 말할 줄 알고, 궁극적으로 도움 없이 의사소통 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인 것 같다. 앞으로도 멋진 사람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덕질을 맘껏 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