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들어 왼손 새끼손가락을 구부리고 펼 때 통증이 느껴졌다. 병원에서는 방아쇠 수지라고 했다. 손가락 힘줄에 종창이 생겨 그렇단다. 주된 원인은 아마도 골프일 것이다. 의사도 골프 때문일 거라고 했다. 당분간 골프를 쉬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된다는 게 문제다. 충격파 치료와 약 처방을 받은 날도 병원을 나와 연습장을 향했다.
2. 확고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부러웠다. 영화 감상 같은 대중적 취미 말고 서핑이나 와인처럼 접근이 힘든 취미 말이다. 물론 영화를 이동진처럼 보고 해석할 줄 알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30대 중반을 넘기고도 취미를 묻는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내 삶이 싱겁게 느껴졌다. 작년부터 LP를 모으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3. 그러다 골프를 만났다. 프로선수처럼 멋진 스윙 폼을 가진 건 아니지만 제법 잘 맞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18개 홀을 돌며 핀을 향해 공을 치고, 각 홀 스코어를 더해 총점을 세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함께 움직이지만 각자 플레이하기에 결과의 책임이 개인에게 있는데도 모든 나이스 하지 않은 샷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 모순도 재밌게 느껴졌다. 인간사의 축소판 같달까.
4. 얼마 전 구력 1년 만에 80대 스코어를 경험했다. 언제부턴가 어지간한 세상사에는 호기심조차 들지 않는 무덤덤한 인간으로 살아왔는데, 오래간만에 신선한 성취감이 밀려왔다. 주변에서 정말 대단한 성과라고 칭찬해주니 내게도 드디어 확고한 취미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5. 어제는 20년 지기 중고교 동창들과 라운딩을 나갔다. 결혼과 육아가 빨랐던 나와 달리 친구들은 여전히 싱글 라이프를 만끽 중이다. 사는 모습이 너무 다르다 보니 자연스레 연락도 뜸해졌는데, 골프라는 공통분모 덕에 친구들과 다시 만나 종일 웃고 떠들 수 있었다. 오랜 친구까지 되찾아주는 취미인데 그깟 방아쇠 수지가 대수일까.
6. 문제는 이 ‘확고한 취미’ 덕에 그전까지 열심히 쌓아온 루틴이 와르르 무너졌다는 점이다. 90분간 걸어서 퇴근하던 루틴은 그 시간에 차를 몰고 연습장을 향하는 일상이 됐다. 지하철과 버스에서는 책 대신 골프 유튜브를 본다. 책을 안 읽으니 서점 갈 일이 없고, 책 사던 돈은 몽땅 골프장으로 간다. 브런치를 일 년 가까이 개점휴업 상태로 만든 것도 이놈의 골프다.
7. 새로운 성취감과 부진했던 관계의 복원을 선사했으나 소소했던 일상의 성실을 앗아간 확고한 취미. 득일까 독일까. 만족과 공허가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