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집 근처에 걸어서 15분, 차로 3분 거리의 아기자기한 동네가 있다. 샐러드빵으로 유명세를 탄 분식점이 있어 우리 가족도 종종 갔다.
재작년쯤 그 동네에 작은 가정의학과 의원이 개원했다. 내부 인테리어가 깔끔했고, 무엇보다 대기실에 장난감이 가득해 아이 키우는 부모로서 좋았다. 소아과 없는 게 단점이던 동네에 구세주가 등장했다며 육아 동지들이 열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이 병원 원장에 대한 불만이 엄마들 사이에서 돌았다. 아이 처방약이 꼭 필요해서 갔는데 약 먹을 정도는 아니라며 돌려보냈다는 말, 진료와 무관한 잔소리를 해 불쾌했다는 말 등이 들렸다.
와이프가 소문을 전했을 때 난 원장을 옹호했다. 우리나라는 의료복지가 잘 돼 있어 일단 병원부터 가는 일이 많으니까, 돈 벌 기회 잡지 않고 돌려보낸 거면 양심적인 의사이지 않느냐고 했다.
이후 나는 어느 날부터 귀 안쪽의 간지러움을 느꼈다. 양쪽 귀가 다 그랬다. 에어팟을 너무 자주 써서 그런가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간지러운 증상이 점점 심해져 결국 그 병원을 찾아갔다.
원장은 내 귀를 한번 쓰윽 보더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원장은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고 그로 인해 내 뇌가 ‘귀가 간지럽다’고 착각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스트레스를 줄이면 해결될 거라고 했다.
스트레스받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한 뒤 진료실을 나섰다. 문외한이 해당 분야 전문가 판단에 저항하는 건 그 전문가가 프로페셔널이 되기까지 견뎌온 시간을 함부로 부정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믿어보기로 하고, 스트레스받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회사 인사 발령으로 세종시에 내려왔다.
세종시에 와서도 귓속 간지러움이 계속됐다. 결국 엊그제 정부청사 인근 이비인후과에 갔다. 의사는 진료용 기기로 내 귀를 관찰하더니 습진이라고 했다. 면봉질 자주 하세요? 네. 면봉 너무 자주 쓰면 안 됩니다. 네. 바르는 약 처방해드릴게요. 네. 30초 만에 진료가 끝났다.
약 바르고 이틀 만에 간지러움이 사라졌다. 이 사실을 오늘 깨닫고 괜한 오해를 산 내 뇌에게 우선 사과했다. 그리고 나는 대체 왜 귀가 간지러운데 가정의학과에 갔을까 후회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내 잘못이었다. 처방을 남발하지 않는 신념에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원장의 진단이 오진이었는지, 아니면 그도 습진인 걸 알았으나 약 바를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건지 궁금했다. 후자라고 믿고 싶다. 낯선 신념도 남의 일일 때나 존중하고 싶지 내 일이 되면 그냥 불편한 아집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습진에는 약이다.
오늘 운전하다가 문득 서울의 그 원장이 귀가 간지러워 자신을 찾은 다른 환자를 스트레스받지 마시라며 돌려보내는 장면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