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도 많다. 세월 따라 어느 날은 가볍고 어떤 날은 진지하고 하루는 웃고 하루는 울기 때문일 것이다. 가벼운 나를 본 이는 날 경박스럽게 기억하고 우는 나를 본 이는 날 슬프게 기억한다. 모든 사람이 경험한 내가 달라, 내가 너무도 많다.
직업 기자로서 독자에게도 한결같지 않다. 멍청한 기사를 쓴 나를 기억하는 이는 날 한심해하고 다른 내 기사에도 찾아가 온갖 조롱을 남긴다. 제법 괜찮은 내 기사를 본 이는 나를 팔로우한다. 누군가를 날려버린 기사를 쓴 내게 잔인하다 말하는 이도 있다.
최근 들어서는 반으로 갈린 사회의 어느 한쪽만 열광할 만한 기사를 많이 썼다. 조직의 논조라는 암묵적 룰과 조직원의 자기 검열이 앙상블을 이룬 결과물일 테다. 분열한 사회로부터 지지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딱 반반씩. 익숙한 풍경이다.
초년병 땐 기사에 악플 달리면 댓글도 달고, 욕 메일 오면 답장 보내면서 반성할 건 반성하고 오해가 있다 싶으면 풀어주려 애썼다. 가끔 구질구질하게 변명도 했다. 내가 단 제목이 아니다, 데스크가 시켜서 쓴 거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얻어맞는다. 지치기도 했고 나태해지기도 했다. 사회 분열과 정치 팬덤이 심화한 후로는 기사를 읽지 않고 욕부터 날리는 사람이 늘어 포기하기도 했다. 그 분열 상황을 클릭 장사에 활용하는 언론사도 혼나야 하니 업보의 심정도 있다. 태생이 유리 멘탈인데 이 직업 10년 하니 적어도 욕받이 쪽으로는 맷집이 세졌다.
물론 그럼에도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남몰래 동경해온, 그의 글과 관점을 좋아해 슬쩍 SNS 팔로우하고 지켜봐 온, 친해질 기회는 없었지만 언젠가 연을 맺고 싶던 업계 선후배가 내가 쓴 기사를 자신의 계정에 올리며 공개 저격할 때다.
그 저격이 평소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근거한 게 아닌, 제목만 읽고 욕부터 던지는 독자나 다름없이 비아냥과 조소로 가득 차 있다면, 상실감은 더 깊다. 나는 그를 나이스한 동료로 기억하는데, 그는 앞으로 날 부끄러운 동료로 취급할 걸 생각하면 슬퍼져서다. 내가 많은데 다른 날 보여줄 기회를 잃은 상황은 상갓집에 들어갈 때처럼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