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 가서 가장 힘든 순간을 꼽으라면 상주와 맞절한 직후다. 문자로는 익숙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를 막상 소리 내 전달하려고 하면 그게 그렇게 어려울 수 없다. 장례식장에 들어설 때마다 속으로 수차례 연습하는데, 제대로 해낸 적이 없다.
최근 지인이 부친상을 당했다. 그를 함께 아는 친구와 동행했다. 두 사내가 나란히 영정 앞에 섰으나 쭈뼛대며 물러나는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꿀 먹은 벙어리 신세는 친구도 다를 바 없었다. 적당한 위로의 언어가 입에 달라붙는 날이 올까.
서툰 조문을 마치고 옆방 테이블에 앉았다. 친구가 두 살배기 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상주인 지인이 우리 자리로 왔다. 친구는 딸 이야기를, 지인은 아버지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했다.
막 새 생명을 얻은 문상객과 막 식구를 잃은 상주 사이에 앉아 잘 키워내야 함과 잘 떠나보내야 함에 관한 싱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죽음의 허우룩함이 빚은 장례식장 특유의 기운 앞에선 어떤 대화도 겉돌았다.
기차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빈소를 나서며 영정 속 고인을 한 번 더 쳐다봤다. 발걸음을 옮기며 옆 빈소 영정도 관찰했다. 거창할 필요 없지만 각자 인생만큼은 잘 살아내라고, 영정 속 고인들이 같은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