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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우 Oct 27. 2024

빨간딱지 줄까 파란딱지 줄까

집행관놈 집행관님

빨간딱지 줄까?

파란딱지 줄까?


어린 시절 푸세식 화장실 밑에서, 귀신이 손에 들고 불쑥 보여준다는 빨강파랑 딱 무서운 딱지일 수 있지.  

빨간딱지는 소위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채권을 받아내기 위해 채무자 유체동산(티브이, 냉장고, 세탁기 등 가재도구)에 붙이는 압류물표목이고, 초록색(파란)딱지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채무자의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지 못하게 묶어두는 가압류 표목스티커로 보면 된다.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집행관님 며칠 전 압류하러 오셨던  00 아파트에 사는 채무자 김 00입니다.

"예... 예, 누구시라고요...?"


중년의 그녀는 강제집행을 할 때, 집행관이 채권자 편에 서서 자신에게 통보도 없이 집에 몰래 찾아와 가재도구에 빨간딱지를 붙인다며, '집행관 놈'이라고 욕을 버럭 질러댔던 목소리와 달리, 전화 속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만 편안해 보여 안심이 되었다.  


유체동산 집행 즉, 가재도구에 빨간딱지를 붙이는 강제 집행은 사전에 채무자에게 집행사실을 통보하고 집행하지 않는다. 강제집행을 한다고 사전에 통보하면 강제집행 전에, 고가의 가재도구나 현금, 돈이 되는 물품을 미리 빼돌려 채권회수를 방해하기에, 사전 통보 없이 강제집행에 착수하는 것으로 민사집행법은 규정하고 있다.


집행관은 채권자가 집행권원(판결문을 말함)을 근거로 집행 위임을 신청하면, 채무자 주거지를 방문하여 압류물표목인 빨간딱지를 붙이고, 압류된 물건을 일괄 경매하는 방법 등을 통해 채권을 회수해 주거나, 인부를 동원해 집안의 가재도구를 꺼낸 후 부동산을 채권자에게 인도나 명도 해주거나, 부동산인도(명도)등 본안소송을 진행하면서 종결되기 전 채무자(피고)가 부동산점유이전을 금지하는 가처분 하거나, 채무자의 비용으로 토지나 건물을 철거하는 대체집행을 해주는 업무 등을 담당한다.


그래서 매일 20여 개의 사건 현장을 직접 방문해 강제집행을 수행하다 보니, 하루 이틀이 지나면 누구를 상대로 어떤 사건으로 집행을 했는지 헛갈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또한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으면서 당사자에게 다른 사건을 설명하다 오해를 사기도 하고, 민사 사건은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함부로 폭넓은 조언도 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당사자가 전화로 문의해도 확신이 없기에 중년의 그녀가 누구이고 어떤 사건인지 즉답을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아... 예... 사모님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나요?."


"집행관님, 채권자 최 00과 합의했고요, 채권자가 집행관 사무실에 동산압류신청 취하 했다고 하던데."

"제 집 가재도구에 붙인 빨간딱지는 어떡해요, 떼어내도 될까요.",


"이전에 집행할 때 집행관님이 채권자 입장만 생각해 주는 것 같아 화가 나, '집행관 놈'이라고 비아냥 거리고 욕도 하고 했는데 죄송하게 생각해요."

 

벼랑 끝에 몰린 채무자의 집을 방문해 빨간딱지를 붙이는 강제집행 행위로 당사자는 형사처벌을 받으면 주거지 행정관청에 통보되어 빨간 줄이 그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에, 집행 현장에서 욕을 먹거나 몸싸움까지 벌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채권자가 집행 취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안내한 후, 업무시스템에 조회하니 채권자가 취하서를 제출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예, 채권자가 취하서를 제출하였네요. 해결되어 참 다행입니다."


"압류하는 날 채권자와 개새끼 소새끼 욕을 하고, 멱살도 잡는 등 마찰이 있어 협의가 안될 것 같더니 어떻게 협의가 되었네요... 잘하셨네요."라며, 채무자가 채권자와 협의한 것은 잘한 행동이고, 우울해하던 그녀가 삶의 의지를 가질 수 있게 격려하고 응원해 주고 싶었다.


"집행관님 조언대로 채권자와 협의하여 채무액 중 일부를 계좌로 변제하였고, 나머지는 매월 얼마씩 변제하는 것으로 협의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집행 취하가 확인되었으니 빨간딱지는 직접 확... 떼어버리셔도 됩니다."


채권자도 압류된 가재도구를 경매를 통해 채권을 회수한다 해도, 채무자 배우자가 우선매수권 및 배당요구를 하게 되면 경매 최호가 금액의 1/2 금액만 받을 수 있고,  그 금액에서 집행비용까지 빼면 회수 해갈 금액이 얼마 되지 않기에, 서로 협의가 될 수 있도록 중재한 보람이 있었다.  

채권자, 채무자가 윈윈한 것이다.


배우자 우선매수 및 배당요구권 : 민사집행법상 채무자 점유 유체동산은 부부 공유재산으로 보기 때문에, 비록 채무자 남편의 채무로 압류되어 경매에 들어가더라도, 배우자인 아내의 공동지분 1/2를 인정해 나머지 남편 지분 1/2만 싸게 매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배우자가 동산을 우선 매수하게 되면 배우자 특유재산(개인재산)이 되어, 채무자 남편의 채무로는 더 이상 압류를 할 수 없게 됨.


그래서 집행관은 직접 당사자가 아니라도 채무자가 채권자와 잘 협의하여 사건이 취하되고, 빨간딱지를 떼도 되느냐는 문의 전화를 받게 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어릴 때 부친의 사업 실패로 채권자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마저 빨간딱지를 붙여 다락방에서 낮에는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를 듣고, 저녁에는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는 기쁨을 빼앗아갔던 기억이 살아나다 보니, 집행관의 입장에서도 채무자를 더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 같다.  

물론, 채권자에게 손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하면서도 채무자에게 사건이 잘 해결되도록 조언을 해주는 등, 채권자 채무자가 서로 윈윈 할 수 있도록 꼬인 실타래를 푸는 것도 집행관의 몫이리라.


이전부터 집행관은 채권자를 대리하여 어렵게 사는 채무자 집에 찾아가 빨간딱지를 붙인 후 경매로 팔고, 집을 빼앗아 채권자에게 넘겨주는 등 채무자의 고혈을 빨아내는 인정사정없는 파렴치한 직업이고, 그 과정에서 화가 난 당사자들에게 욕을 먹고 하물며 맞기까지 하는 직업으로 알려져, 친구는 물론 가족마저 집행관에 지원하지 말고 공직에서 정년퇴직 하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집행관을 지원해 근무를 하고 있고, 집행관은 부정적인 이미지만 있는 것이 아닌 채권자와 채무자가 윈윈 할 수 있도록 화해를 돕고, 법 절차 진행과정에서의 조언, 유리한 해결방법 제시와 따뜻한 격려를 통해 삶의 의지를 이어갈 수 있게 햇살을 비춰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무거운 송달서류를 가방에 넣고 우정공무원 역할로, 동산 압류나 부동산인도 서류 등을 들고 강제집행 현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집행관이기에.


집행관은 개인사업자이고, 집행관법 등에 따라 공무원 지위로 업무를 처리하는 독립된 법집행기관이며, 그 업무는 법원 서류의 송달, 채권자(원고)를 대리하여 유체동산의 강제집행, 검찰청에서 신청하는 벌금 및 과태료 등 징수, 부동산인도 및 명도 집행, 부동산철거 등 대체집행, 부동산경매와 관련된 부동산현황조사, 부동산경매 절차 진행 등의 업무를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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