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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Nov 23. 2021

무병장수: 무병을 앓으며 장수할 상인가

“안녕하십니까. 더 마스크드 피디 탤런트 참가자, My Best Chance, MBC를 잡기 위해온 000입니다. 저는 사람들 인생에 전지적으로 참견하여 그들의 인생에 재미를 찾아주는 것을 즐깁니다….. 마트 알바, 농활, 국토대장정을 통해 안 싸우면 다행인 사람들 속에서도 케미를 형성하고…… 어… 영상, 팟캐스트부터 연극까지 선을 넘나들며 시도하는 무한 도전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능 PD라는 꿈을 품고도 매일 아침 아무튼 출근을 하며 계속 도전을 해서, 결국 이 자리에 섰습니다…. 어… 음…” 


“괜찮아요, 물 한 잔 마셔요. 긴장 많이 되죠?”

“네, 감사합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앞에 비치된 작은 생수를 마셨다.


“네… 아이디어 전쟁터인 스타트업에서 추진력을 배우고, 신입사원임에도 프로젝트를 이끈 경험, 연극 활동을 통해 어떤 극한 야생에서도 구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음… 놀면 뭐하니 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모두 나 혼자 산다는 세상, 함께 노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PD가 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고 고생했네. 프로그램 넣느라”

“그러니까. 안 틀리고 따악 했으면 진짜 멋있었을 텐데.”


그때부터였다. 뇌가 새하얗게 질려버린 것이. 자기소개로 분위기를 휘어잡아서 면접을 주도하겠다는 나의 하나뿐인 계획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질문은 사실 별개 없었다. “다른 경력이 있는데 예능 PD를 하려고 결심한 동기는?” “경력이 있는데 새로 시작하는 것에 대한 각오가 있나요?” “스트레스받을 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PD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나요?” “요즘 mbc 말고 즐겨보는 예능이 있나요?”따위였다. 어디서 변별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마저도 더듬으며 말했다. 나를 판단하고 지켜보는 제3의 카메라가 300%로 작동한 거 같다. 말을 하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아 너무 길어. 면접관들 표정 좀 봐. 지루해하잖아. 너무 기다니까? 아 이건 인상적인 답이 아니야. 아 이걸 이야기했어야지! 하나도 설득적이지 않아. 진정성이 안 느껴진다고’ 


15분.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버린 내 인생의 관문, 15분. 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배웅해주는 mbc 인사팀 직원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mbc 건물을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건물에 들어갈 때는 그 떨리는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었는데, 끝나고 나서는 황망함만이 남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어느덧 서른한 살. 2년 전 늦게 시작한 PD에 대한 도전.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올해 시험 중 마지막 남은 지상파 방송사의 시험이었다. 2년 만에 겨우 통과한 필기에서 간신히 잡은 면접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 나는 그것을 무참히 놓쳐버린 것이다. 예상 질문들에 답을 달아보고, 선배한테 연락해 조언도 구해보고, 예능 피디가 쓴 책 8권을 빌려 읽어내며 감을 잡기 위해 노력했는데… 면접장에 앞에서는 모든 것이 초기화되었다. 택시 안에서 질문을 바로 곱씹어보았다.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기분인데, 눈물이 나야 할 거 같은데 눈물이 나지 않는다. 마음은 답답하고 허망한데, 눈물 버튼은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막 울어내고 쏟아내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감정이 고장 난 듯 그저 멍하니 상암동을 지나 한강을 건너며 한강 둔치에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면접 순서가 두 번째였던 탓에 모든 걸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오전 10시 30분. 집을 떠난 지 세 시간 만에 모든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집에 와서는 멍한 상태로 잠을 잤다. 그것 말고는 어차피 할 게 없었다. 그런데 그 멍함은 10월 10일에 있었던 면접이 끝나고 한 달이 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멍함은 마음속에 판도라 상자를 감추기 위한 안개 같다. 연막 같다. 


‘넌 PD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게 아니야. 네가 진정으로 원하고 그게 네 꿈의 해답이라고 생각했다면 넌 떨지 않았을 거야. 어떻게 하면 더 진정으로 보일지 고민하지 않았을 거야. PD가 되고 싶다는 건 순수한 진실이 아니었던 거야.’


감당하기 싫은 무서운 말이었다. PD를 준비하기 시작한 건 이것만이 내 길이라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큰 회사에서 일을 해보고 싶은데, 내 나이에 신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방송사가 최선이었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유튜브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만큼 영상으로 전하고 싶은 말들도 많았다. 인생의 소명까지는 아니지만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은 싫었던 나는 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안의 동기가 선명하지 않으니 면접이 너무 두려웠다. 이것만이 내 길이라고 생각하는 간절함이 극에 달한 지원자들 사이에서 나는 ‘뽀록’이 날 것만 같았다. 덧붙여 준비를 하면서 자꾸 내가 영상을 편집하고 있는 모습은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최종 합격을 하고 나서도 내가 영상 편집을 기갈나게 할 수 있을까. 계속 의심스럽고 자신감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건 기술의 영역이라고 해도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근데 그러면 뭐? 시간은 시간대로 날려 놓고, 그럼 뭘 하고 싶은 건데? 내 안의 내가 다그친다.


구석에 있던 두 번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배우가 하고 싶어. 에너지를 쏟아내고 싶어. 나는 쇼를 하고 싶은 퍼포머야.’ 가장 재밌을 거 같지만, 가장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운 말. 하지만 PD를 준비하는 내내 불쑥불쑥 튀어나와 무병처럼 며칠을 앓는 마음. 무병장수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어쩌면 나는 평생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걸 두려움에 못하고 무병에 걸린 채 평생 사는 게 아닐까. 마음이 자꾸만 슬퍼진다. 나는 무병장수할 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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