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원치 않는 선택으로 성장을 해내야만 하는 때가 있다
“신뢰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신뢰? 사회에 그런 게 있었어? 극단에 처음 간 날, 들었던 첫 질문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연출은 대답 없이 바로 훈련을 이어 나갔다. 우리는 짝을 지어 서서 5분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날 처음 본 사람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낯간지럽기 짝이 없었다. 무슨 연인도 아니고. 어색했다. 길을 걸을 때면 스마트폰에만 눈을 박고,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었다. 가족 하고도 하루에 한 번 눈을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방 안에서 현관문 소리가 나면 소리쳐 인사나 하는 정도였다.
처음에는 어딜 봐야 할지 쑥스러워 눈웃음 지으며 흔들리던 눈동자는 시간이 갈수록 고요해졌다.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는데, 마음도 가만히 가라앉았다. 눈동자의 흔들림, 눈빛의 변화, 눈이 짓는 표정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의 마음이 전해졌다. 길게 느껴졌던 5분이 끝난 뒤 상대의 눈에서 느껴지는 것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다. 따뜻함, 호기심, 슬픔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동시에 마음은 차분해지고 안정감이 들었다.
그다음에 이어진 활동은 눈을 감고 뛰는 것이었다. 반대편에 나를 받아줄 사람이 서있었다. 분명히 반대편에 나를 안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을 봤는데도 눈을 감고 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한 발짝 앞으로 갈 때마다 순간순간 벽에 부딪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뛰어가는 나를 상대방이 받아줄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다. 뛰다가 왠지 도착했을 거 같아 몸이 뒤로 움츠러들었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두려움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신뢰는 눈 마주침과 보호받는 느낌에서 옵니다”
활동을 하고 나서 연출이 말했다. 머리가 띵 했다. 살면서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오히려 신뢰 같은 건 사람 사이에 있기 힘든 거라고 생각했었다. 사회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가치를 배웠던 그 순간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뒤로 극단은 나를 성장으로 이끈 소중한 공간이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극단을 떠나온 지 1년이다. 언젠가는 이별할 줄 알았다. 나의 성장을 극단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별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일찍, 갑작스럽게 이별했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으나 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전 남자 친구에게도 이 극단이 필요한 공간일 것 같아 합류를 권해 함께 활동을 했다가 스트레스에 못 이겨 결국 내가 나오게 된 것이었다. 나오는 과정에서 두 배우를 모두 잡으려는 연출의 욕심 때문에 마찰도 있었다. 처음에는 내 입장을 지지하다가 나중에는 말을 바꾼 것이다. 존경하던 사람에 대한 미움과 배신감과 함께 존경하던 사람을 증오하는 마음이 생긴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뒤범벅이 된 채 극단을 나왔다. 시작이 반이면 끝은 전부라고 했는데,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지 못해 마음이 쓰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이별이었기에, 조금 일찍 온 것뿐이라며 나를 다독였다.
개뿔. 마음이 어디 다독인다고 쉬이 말을 들었던가. 내 삶에서 극단이라는 공간이 빠져나간 자리는 구멍이 생각보다 컸다. 극단은 그동안 내가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도 괜찮았고, 어떤 생각을 말해도 괜찮았다. 나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었고, 내 안에 쌓인 무언가를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혼자 또는 같이 마음껏 소리 지르고 눈물 흘리고 춤을 추고, 노래하던 공간이었다.
그 공간이 날아가면서 내 숨도 같이 날아가버린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에 구멍이 뚫렸지만 숨을 쉬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그 구멍은 블랙홀처럼 긍정적인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동시에 극단 없이 살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존중 없이 계속 활동하는 전 남자 친구에 대한 증오심과 연출에 대한 분노를 끊임없이 뿜어 댔다. 그 지옥 같은 마음은 거래처와의 회식자리 같은 엄한 장소에서 불쑥 튀어나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술 먹고 길가에서 죽고 싶다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서 안에 있는 것을 뱉어내고 뱉어내도 마음속의 답답한 응어리는 뱉어지지가 않았다.
다행히 지옥도 걷다 보니 익숙해졌다. 변한 것은 없다.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은 여전하며 극단에 다시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극단 없이 스스로 버틴 시간이 다시 나에게 극단 없이 살 수 있다는 증표가 되어 주고 있다. 사실 아직 극단만큼 내 에너지를 만족스럽게 쏟아낼 수 있는 공간은 찾지 못했다. 눈 딱 감고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 얼굴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이제는 점점 현실을 받아들이고 극단에서 배운 점들을 스스로 상기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한다.
극단의 의미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된다. 전에는 내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눈물도 많으며,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이해해주고받아주는 사람이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에너지가 많아 쓰지 않으면 고여서 썩는 사람이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며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비현실적인 꿈을 꾸지만, 함께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한번 사는 인생, 불인 줄 알고도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열정을 불태우며 살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선택한 이별, 돌아갈 곳은 없다. 어쩔 수 없이, 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