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한 달여의 휴가 끝에 퇴직을 결정했다. 결심과 실행은 완전 다른 이야기다. 아내는 당연히 내가 말로만 퇴직하는 줄 알았나 보다. 자칫하다간 사기결혼한 게 될 처지다. 이혼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소득증가는 디폴트다!
응원은 거의 없다. 부모님도, 장모님도 도무지 나를 이해하지 못하신다. 오직 막내아들만이 "아빠 인생이니, 아빠가 원하는 대로 사세요!" 라며 조건 없는 지지를 보낼 뿐이다. 그 녀석 휴대폰에 난 이제 '100억 아빠'로 저장되어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틈나는 대로 퇴사를 운운하던 동기, 선후배들이 나의 퇴직 소식에 더 당황한다. 이제 곧 오십인데, 큰아들이 고3인데, 너무 대책 없고 성급한 결정 아니냐며 나무란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내게 별 관심 없다. 퇴사 만류가 나에 대한 관심표명 중 가장 무난한 것이기에 의례히 그러는 거다. 그래도 마지막엔 건강과 행복, 그리고 성공을 기원해 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48년을 헛살진 않았나 보다.
퇴직을 뼈아프게 체감한 건, 그러나 뜻밖의 전화통화를 통해서다. 여기저기서 카톡을 받고 명예퇴직이 공식화되었음을 알게 된 후, 인사부 급여팀에 전화를 걸었다. 퇴직금이 궁금했다.
"어제부로 퇴직한 임요세프입니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허걱!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무슨 일이라니요? 퇴직자가 당연히 퇴직금이 궁금하니 전화를 했겠죠. 어제 인사팀장, 그리고 급여팀 차장님께도 전화요청 메시지 남겨놓았는데, 못 받으셨나요?"
"네, 전달받은 내용 없습니다.., 어떤 일, 아니 누구라고 하셨죠??"
...,,,
나보다 스무 살은 어릴 인사부 직원과의 통화로 난 영혼을 다쳤다. 어리고, 경험이 없고,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상대방 목소리에는 차분함과 권태로움이 섞여 있었는데, 어쩌면 톤과 매너, 모두 연출되고 단련된 것 아닌가 싶다. 그러게 왜 멀쩡한 회사, 신의 직장을 퇴사해서 이런 일까지 당하느냐 한다면, 별로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시작보다는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회사 밖은 지옥이라더니, 이게 그 시작인 걸까?
차라리, 조직의 쓴 맛을 빨리 알아서 다행인 것일지도 모른다. 22년이 외사랑이었건, 아니면 계약연애, 행여 찐사랑이었건 간에, 이젠 '헤어질 결심'이 한층 쉬워졌다.
인사부 대리에게 퇴직일로부터 14일 이내라는 지급기한 철저히 준수하지 말고, 하루속히 퇴직금을 송금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산 명세서를 받을 이메일을 알려달라는데, 나도 모르게 사내 메일을 불러주다, 아차! 싶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더니, 미련 없이 떠난다는 게 참 쉽지가 않다.
이튿날, 이번에는 다른 인사부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20년 이상 재직한 데 대한 '감사패'를 보내준다는 내용이었다. 병 주고 약 주고다. 그래도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희소식은 또 있다. 20년 이상 낸 동기회비도 환급해 준다 하고, 3월 급여도 일할 계산해서 정산해 준단다. 수억 원에 달하는 퇴직금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세대주이자 공무원인 아내 덕에 건강보험도 상실되지 않는다. 그래서, 퇴직금 전액을 세대주에게 신탁하기로 했다. 그녀의 화는 분명 누그러질 것이다.
퇴직을 실행한다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차라리 설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낯선 일을 배워야 하는 두려움도 있지만, 뭐 괜찮다. 사는 동안 두려움과 불안감은 언제나 함께다. 용기와 열정이 아직 살아 숨 쉴 때 '도전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
당분간 새로운 일터에서 받게 될 반토막(!) 월급도 퇴직금과 생활패턴의 단순화 덕분에 버틸만하리라. 좋은 대학에 큰 미련이 없는 고3 아들에게도 감사(?)하다.
공교롭게도, 퇴사하는 날 네이버 프로필이 승인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두 가지 모두 오래전부터 바라던 일이었기에 더욱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퇴직일은 새로운 기념일이 됐다. 결과적이지만, 최근의 <이승철과 나> 출간도 퇴사를 위한 빌드업이 됐다.
이제 나는 천상계에서 인간계로 내려왔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꿀 준비는 되어 있다. 끝은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