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먹잇감을 구하려면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지만, 바다표범과 같은 바다의 포식자들이 두려워 망설이게 된다. 이때 가장 먼저 바다에 뛰어들어 다른 펭귄들도 뒤따라 뛰어들도록 이끄는 펭귄을 <퍼스트 펭귄>이라고 한다.
누군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어야 다른 후발주자도 뒤따라 진출할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첫 번째 도전자가 있어야 새로운 시장(블루 오션)이 생기는 법이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위험을 감수하며 목표를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퍼스트 펭귄 상>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우리는 대부분 첫 번째 펭귄이 되기를 두려워한다. 그게 보통의 인간 본성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긴 배고프다는 이유로, 굳이 영웅심리를 발휘할 필요는 없다. 나의 목숨은 소중하고, 내가 지켜야 할 가족과 동료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첫 번째 생존자가 건네준 파이를 감사히 받으면 될 일이다. 평소 무리 속에서 규칙 잘 지키고, 성실히 살며, 가끔 선행도 베푼다면, 나에게 돌아오는 파이는 다른 누군가의 몫보다 조금 더 많을 수도 있겠다. 모범생으로 살면, 안전성은 보장되고, 최소한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다만, 퍼스트 펭귄을 질투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될 일이다. 공정성, 형평성, 정의감을 운운하며, 첫 번째 펭귄의 목숨 건 도전에 따른 몫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된다.
말은 멋있지만, 사실, 바다에 첫 번째로 뛰어드는 펭귄의 목숨은 담보하기 어렵다. 설령 한두 번은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여러 번 반복되면, 생존확률은 극히 낮아지기 마련이다. 성공확률이 높다면야 누구인들 본인 이름(브랜드) 걸고, 자신만의 업(業)을 시작하고 싶지 않겠는가.
K는 나와 동갑내기다. 알고 보니, 같은 대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열 중 여덟, 아니 아홉은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창업이 아닌, 취업의 길로 들어섰으리라. 본인의 능력과 가치가 어느 조직에 입성하느냐로 결정된다고 믿는, 이른바 모범생 집단에 속하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나와 같은 대학 같은 과 출신 동기 중에서, 학교 졸업과 동시에, 찬 바다로 뛰어든(창업한)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K도 20대부터 회사를 창업한 건 아니었다. 경력을 보아하니, 그렇다고 고시 공부를 하거나, 회계사나 변리사 같은 전문 자격증 공부를 한 것도 아니다. 이름난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인턴 경험을 쌓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남들 보기에는 조금 답답하고 느려 보여도, 긴 호흡으로 인생을 설계했다.
K는 동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학(MBA) 석사학위도 취득했다. 그런데, 전공과목이 특이했다. <사회적 기업>을 공부한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훨씬 전의 일이다. 자본주의의 종주국에서 유학하며, 흔히들 선택하는 재무, 금융, 경영전략(컨설팅) 분야가 아니라, <동반 성장>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한 것이다.
공부를 끝낸 그의 다음번 선택지는 역시나 남달랐다. K는 UN 사무국 산하 기관에서 인턴십을 했다. 맡은 업무는 공공분야와 시민사회 부문을 대상으로 하는 역량 개발 워크숍이었다. 선진국의 역량과 성과를 개발도상국의 정부, 기관, 단체에 제공하는 지식공유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K는 UN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 하고, 예산을 확보해, 사회적 기업가를 꿈꾸는 국내외 예비 창업자들을 지원하는, 동반 성장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행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삼십 대 후반 창업기획자의 길에 들어섰다.
무슨 일이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0년의 시간은 필요하다. 매일 3시간씩 10년을 계속하면 1만 시간이 걸리니, 1만 시간의 법칙과도 일맥상통한다. K가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회사를 설립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딱 그 정도다. 서두르지 않고, 남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며, 10년을 준비했으니, 이젠 창업한다고 해도, 준비가 안 된 <무모한 펭귄>이 될 리는 만무하다.
K는 엑셀러레이터(Accelerator)다. 아직은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어려운 용어다. 그래도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가속자(加速者)라는 직역보다는, <창업기획자 겸 초기 투자자> 정도로 번역하는 게 적당할 듯하다.
K의 회사는 전도유망한 초기 스타트-업을 발굴한 후, 수개월간 멘토링, 창업 교육, 시설제공, 투자설명회 개최 등의 프로그램을 지원하며 성장을 가속화(accelerating) 하는 역할을 한다.
그가 경영 컨설턴트와 다른 점은, 스타트-업에 필요한 초기 운영 자금을 직접 투자한다는 점이다. 가진 거라곤, 사업 아이템 혹은 아이디어밖에 없는 (예비) 기업에 자본금을 투자한다는 건, 사실 높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K는 <퍼스트 펭귄>에 투자하는 <퍼스트 펭귄>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투자 여력은 적다. 본인 자본금이 크지 않은데, 제삼자에게 큰 금액을 투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사업 초창기 3천만 원, 5천만 원, 크게는 1억 원까지도 과감히 투자했다.
K가 처음부터 천사(Angel) 투자자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다. 납입자본금 5천만 원의 법인이 어떻게 타 기업 투자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당장, 그가 공들여 영입한 인재들의 몇 개월 치 급여만 해도 족히 자본금 규모를 넘어설 판이다.
그의 미션은 동반 성장의 가치, 환경보호와 생태계의 복원을 중시하는 기업가를 최대한 발굴하고, 컨설팅하는 것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예비 기업가, 기술력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을 모집한 후, 동기 부여함과 동시에, 사업성 있는 기술과 아이디어는 지식 재산화했다. 여러 기업이 회의와 토론할 수 있는 사무 공간을 제공하고, 각 전문 분야의 멘토들을 모셔 와 청년 창업가들에게 사업화의 길을 제시했다.
그중 싹수가 보이는 떡잎에는 직접 초기자본금도 대고, 부족하면, 직접 뛰어다니며, 대기업과 금융기관, 공공 기관들로부터 후원도 받았다. 뜻을 같이하는 단체들과는 협약사업을 계속 늘려나갔다. 전국 지방자치 단체 창조경제 혁신센터 내 입주기업들을 위한 맞춤형 컨설팅, 홍보(IR), 투자유치 활동도 지속했다.
시간이 흐르자, K의 법인에 투자하는 기관, 개인, 단체들이 계속 늘어났다. 유상 증자 횟수만 10회 이상, 지금껏 실제로 모집된 투자액만 해도 수십억 원이다. 그가 허튼짓하지 않고, 엉뚱한 데 돈 쓰지 않고,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기업을 경영한다는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물론, 돈이 인간 됨됨이를 따르는 건 아니다. K와 회사의 전문가들이 직접 발굴하고, 물심양면 지원하는 기업들이 잘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K의 회사는 8년째 회사 규모와 매출액, 영업이익이 지속 증가세다.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대부분 컨설팅 업무에서 나온다. 요즘은 대기업, 금융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 기관으로부터 의뢰받은 <사회 공헌 사업>과 <대. 중소기업 동반 성장 프로젝트>, <해외 진출사업 사전 검토>, <탄소 중립 경영 타당성 검토> 등 ESG 경영 관련 업무가 많다.
선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규모가 큰 기업, 단체들이 용역을 의뢰하면서, 성장성 있는 중소기업의 발굴, 그리고 투자를 함께 위임하기 때문이다. 법인설립 10년 차, 이젠, 가만히 있어도 여기저기서 돈을 싸 들고 와서, 투자할 만한 기업을 물색해 달라는 요청이 즐비하다.
여태껏 투자한 기업의 총수는 150개 이상, 총투자 금액은 200억 원이 넘는다. 외부의 투자조합, 펀드에서 수탁받은 계좌 잔액도 백억 원에 달한다. 주력인 컨설팅도 가려서 받을 정도다. 실로, 엄청난 성장 속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공 투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작년만 해도 벌써 4개의 투자기업이 폐업했다. 모두, 청운의 꿈을 안고 사업을 시작한 청년 기업가들이 운영하던 벤처였다. 음식점 프랜차이즈업, 디자인업, 광고업 등 업종도, 폐업 사유도 다양했다. K의 투자 금액은 적게는 5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까지니, 연간 손실 금액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단순히 투자 손실만 문제가 아니었다. 지분만 투자하고, 경영은 기존 CEO를 믿고 맡기는 걸 원칙으로 삼다 보니, 예상치 못한 추가 손실까지 떠안게 되는 일이 생겼다. 종속회사 지분율이 50%를 넘게 되면, 2차 납세의무도 지게 된다. 자회사가 국세를 체납하면, 모기업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떠안는 일까지 벌어지는 셈이다.
몇 년 치 부가세, 법인세가 한 번에 부과됐는데, 그 금액이 억대였다. 애당초 사업 계획서, 그리고 사람만 믿고 투자한 것이었으니, 이제 와 누굴 탓하랴.
이렇듯, 숱한 <퍼스트 펭귄>들이 실패자가 되곤 한다. 어떤 경우엔 그 실패는 돌이키기 힘든 결과로 이어질지 모른다. K도 만약 10년 담금질의 시간이 없었다면, 능력 없고 어쭙잖은 사기꾼(!), 실패한 투자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내 돈을 불려주면 천사(Angel)지만, 그 반대는, 바로 악마(Evil)가 되는 게 세상인심이다.
매해, 중도 탈락하는 투자처는 생기기 마련이다. 족집게가 아닌 이상 불가피했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이라 해도 10년 앞은 모르는 게 세상일이다. 아니, 그게 세상살이라면, 옛 선현들의 지혜를 빌려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기라도 하련만, 삶(생존) 아니면 죽음(폐업)밖에 없는 기업은 한 번 무너지면 사실상 재기 불능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K의 회사는 작년에도 20억 이상의 흑자를 실현했다. 투자기업에 대한 평가손실은 성과에 비할 바 못 된다. 지분을 보유한 회사만 해도 100개 가까이 되는데, 어찌 다 잘 될 수 있으랴. 잘못된 일 말고, 잘된 일에 주목해야 사업도 인생도 술술 잘 풀리기 마련이다.
K가 몇 해 전 투자한 인공지능(AI) 기술개발 회사, 그리고 파력(波力) 에너지 회사가 미래 성장성과 기술력을 인정받아 기업공개(IPO)를 준비한다는 소식이다. K 회사가 이 두 기업에 투자한 금액은 합계 2억 원이다. 이를 현재 기업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2백억 원에 이른다. 이 추세로, 주식시장에 상장하면, K와 그의 회사에 투자한 주주들, 그리고, 스톡옵션을 부여받은 임직원들은, 말 그대로 <돈방석>에 앉게 된다.
<퍼스트 펭귄>이 숱한 위험을 무릅쓰고 난 후, 경제적 과실로 보상받는 건 당연한 결과다.
K의 도전은 이렇게 해피 엔딩이 되어가고 있다. K와 회사 임직원들에겐, 이미 유망한 창업기업을 발굴하고, 지원하며,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전략과 시스템, 그리고 <성공 DNA>가 내재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새 수많은 주주와 이해 관계자들, 그리고 정부 부처까지도 동반 성장의 파트너로 함께한다.
<퍼스트 펭귄>은 4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의 컴퓨터공학과 교수 랜디 포시(Randy Pausch)의 마지막 수업에서 나온 말이다. 그가, 췌장암으로 6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 <당신의 어릴 적 꿈을 실현하라>고 설파했다. 강의를 통해, 그는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학생에게 <퍼스트 펭귄 상>을 수여했다.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이라도 용기를 내 도전하라고 독려한 것이다. 그래야만 다른 누군가도 연이어 도전할 수 있고, 사회에 동기부여가 가속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 K 대표도 올해 마흔일곱이다. 이제, 그는 <퍼스트 펭귄 상> 수상자보다는, 시상자의 자리가 어울릴 정도의 베테랑 경영인이 되었다. 이제, 카네기-멜론 대학이 아닌, 서울 성수동에 터 잡은 K의 본사가, 예비 창업가들의 도전정신을 높이는 투자자(Accelerator), 동기부여자(Motivator), 촉진자(Promoter)의 본류가 되길 바라본다.
직장인과 기업가, 그 사이 <투자자>의 자리가 있다. 99%의 투자자가 상장 기업의 주식을 사고팔 때, 1%는 기꺼이 <퍼스트 펭귄> 투자자의 길을 간다. 물론, 투자 위험은 더 크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금액으로, 기업의 초기 성장을 도모하는 진짜배기 투자자, <날개 없는 천사>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선택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