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3년, 감 8년
3년 연속 적자기업의 회복탄력성
커피 가공업체를 운영 중인 40대 후반의 K는 원래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S그룹 계열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업무를 하던, 이른바, 잘 나가는 대기업 출신이다. 게다가, 처가 쪽 경제력이 좋았던지라, 일반적인 직장에 비해서는 돈 걱정하지 않고 비교적 풍족하게 살아온 편이다.
높은 연봉과 직업적 안정성, 30대 중반에 서울 시내 자가주택까지, 이 정도면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평생 먹고사는 데 어려움 없을 수준이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그런가. 삶의 궤적이 롤러코스터와는 한참 멀 것 같은 일상이지만, 사실 K는 자기 사업을 하고 싶었다.
월급쟁이로 무탈하게 정년까지 잘 다니다가, 은퇴 후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반면, 한번 사는 인생, 결과야 둘째 치고, 기업가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도 있다. K는 후자다.
그는 30대 후반까지 별다른 시련을 겪어보지 않았던지라, 세상을 좀 만만하게 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지금까지 나름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왔기에, 지금의 성취가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운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현재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은 여태껏 살아온 제 인생의 총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K는 자신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도 하지 않던가. 결국, 그는 30대 중반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처가댁의 든든한 지원도 있었기에 두려움은 덜했다.
그는 온라인 쇼핑몰이 한창 생겨나던 2000년대 후반, 호기롭게 전자상거래 소매업체를 설립했다. 취급 품목은 화장품과 생활잡화였다. K-뷰티 열풍이 불기 훨씬 전이었지만, 가성비 높은 여성용 브랜드를 다수 확보하고 온라인 홍보에 신경을 쓰자, 짧은 기간 내에 해외 주문이 가파르게 늘어났다.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순항했다. 생활용품과 화장품 산업 전반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E-Commerce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자, 회사 규모는 크게 증가했다.
K는 경기도와 인천에 땅도 사고, 창고도 지었다. 화장품뿐만 아니라 각종 식음료 제품과 생활잡화까지, 취급 품목도 계속 늘렸다. 온라인 플랫폼에는 국경도 없다. 어느새 그는 100만 불 수출탑까지 받는 <산업의 역군>으로 거듭났다.
사업장을 마련하고, 시간이 10년 흐르니, 땅값은 저절로 몇 배가 올라 있다. 사업을 시작하고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돈은 건물(땅)이 벌어다 준다는 세간의 평은, 참인 듯하다.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 경기침체를 겪고, 인구감소로 나라의 근본 경쟁력이 하락하니 뭐니 해도, 서울 수도권의 땅값이 떨어질 리는 만무하다.
화장품, 생활용품, 먹을거리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도 꾸준히 잘 팔린다. 생활필수품은 수요가 꾸준하기 때문이다. 매출액과 총자산 규모는 우상향 한다. 대규모 기계설비 도입이나 연구개발에 자금이 계속 투입되는 제조기업도 아니다 보니, 영업수익금으로 직원들 월급도 넉넉하게 주고, 주주 배당금도 지급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영락없는 K의 성공 이야기다. 그러나, 주변 지인들이 K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정말 배가 아픈 것인지, 아니면,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하나 얹고 싶은 것인지. 여기저기서 투자 제안, 사업 제안이 들어왔다.
그중에서 K의 시선을 끈 것이 바로 <커피 가공업>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지인(후배)의 투자 제안이 들어온 시점, 공교롭게도 K는 커피에 푹 빠져있었다. 더구나 다년간의 사업 경험으로 인해 원료 수급에도 자신 있었다. 사업 포트폴리오의 다각화, 기업의 수직 계열화라는 측면에서도 나쁠 게 없어 보였다.
K가 법인을 설립한 게 2017년이니, 이 사업도 올해로 벌써 7년 차다. 사실, K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륵(鷄肋) 같은 커피 때문에 밤잠을 잘 못 이뤘다. 커피를 많이 마셔서가 아니라, 커피 사업이 잘 안 됐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커피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건, 이제 더 이상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상식이다. 파이가 커졌으니, 사업 참여자 수도 크게 늘었다. 단순히, 커피 프랜차이즈 사업자만 증가한 게 아니라, 커피 원료(생두)를 수입해 원두로 가공하는 회사들도 많아졌다.
K가 생각한 것보다 시장 경쟁은 더 치열했다. 투자 비용도 계속 증가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직접 공장을 운영하지 않고, 처음부터 후배 H를 대표이사의 자리에 앉혀 경영을 위임했다는 점이다.
대기업이야, 어느 정도 비용이 발생해도, 업무 분업화와 효율화를 위해 전문 경영인(대리인)이 필요하다. 주인(대주주)이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닌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대리인에게 보너스, 스톡옵션 등을 제시하면서 더 나은 성과를 내도록 독려하기도 좋다.
그러나, K가 지분을 전액 출자한 커피 가공업체는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일 뿐이다. 본인은 기존 주력사업 경영에 매진한다는 이유로, 가족도 아닌, 제삼자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건, 어느 모로 보나 판단 착오다.
일주일에 한두 번, 사업장에 들려 로스팅이 잘 된 커피나 한잔 마시면 되지 않겠느냐는 (한가한) 생각은, 좀 심하게 말하면 회장 놀음이나 다름없다.
처음 법인 설립할 당시 납입자본금은 5천만 원이었는데, 지금까지 K가 추가로 회사에 투입한 개인 자금(가수금)은 10억 원이 넘는다. 고급 로스팅 기기 수입, 브랜딩/선별기 등 기계설비와 로스팅 자동화 프로그램 구매, 원료(생두) 재고 확보 등에 계속 돈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투자금이 대부분 과하게 지출됐다. K가 출근하지도 않고, 자금관리를 믿고 맡기다 보니, 돈이 계속 센 것이다. 내부통제가 없으면, 방만 경영과 돈 사고는 불가피하다.
상황이 이럴진대, 커피 사업이 잘될 턱이 없다. 애당초, K가 큰 금액을 과감하게 투자한 건, 사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 대기업과 커피 원두 대량 납품 계약을 체결하게 됐다는 H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K와 술자리에서 만난 대기업 경영진의 호기로운 구두 약속도, 통 큰 투자에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난데없이, K는 대기업으로부터 계약 불가를 통지받았다. 납품단가를 더 낮추어 달라는 요구까지도 수용했는데, 결국 다른 경쟁사를 파트너로 낙점했다는 소식이었다. 영업총괄자인 H를 다그치며, 그 뒷배경을 추궁해도 잘 모르겠다는 답변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대기업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한탄밖에 없다.
그렇다고 갑자기 다른 거래처가 뚝딱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대기업 놈(!)들이 미안하다며 다른 사업을 제안해 오는 것도 아니다.
생산성, 성장성 등 무슨 지표 하나도 나아지는 게 없으니, 아무리 믿고 맡기는 스타일의 K라고 해도, 더 이상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 원망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없다.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본인의 잘못도 크다.
K 대표는 경제적 손해가 더 커지기 전에, H를 비롯한 초창기 직원, 주주들을 모두 내보내고, 직접 대표이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회사는 3년 연속 적자 상태였다. 특히, 작년 매출액은 그 전년도 매출액보다 30% 이상 감소했다.
기존 경영진과 직원들을 내보내고, 뒷수습하는 일에 에너지가 많이 들었다. 게다가, 예전 대기업 계약 불발 사태의 데자뷔 같은 사건이 작년에도 벌어졌다.
프랜차이즈 편의점으로 유명한 모 대기업이, K와의 원두 납품 합의 단계에서, 생산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납품가격 조정을 요구한 것이다. 그동안 쌓아 둔 이익잉여금이 있었다면야, 대기업 거래처라는 이점을 살려, 일단 매출액과 기업규모부터 키우고 볼 일이지만, 현시점에 앞으로 벌어서 뒤로 밑지는 장사를 하다간, 바로 부도가 날 판이었다. K는 눈물을 머금고, 계약을 거절했다.
벌써 두 번째 대기업의 민낯을 제대로 본 셈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커피 원두의 경쟁력이 확인됐다는 점이다. 고급 티(Tea)에 대한 수요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브라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에티오피아 등 해외에서 고품질의 원료(생두)를 저렴하게 수입하고, 커피 로스팅에도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아무래도 제품(원두)의 맛이 뛰어나다.
본연의 콘텐츠(제품)가 가격과 품질 면에서 경쟁력 있고, 모기업은 <온라인 마케팅> 지원도 받게 되니,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졌다. 쿠팡이나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통한 소매 매출도 빠르게 늘어나는 중이다.
대기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니, 고객군이 넓어졌다. K가 CEO에 취임한 후 안정적인 경영권이 확보됐다. 새로 영입한 직원들도 열심히 하다 보니, 작년 말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사업자와도 거래하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올해부터는 여러 중소형 커피 브랜드에서 주문량이 증가하고 있다. 곧 자사 몰(Mall)도 오픈 예정이니, 총매출액뿐 아니라, 영업이익도 더 높아지리라 예상된다.
그렇지만, 계속기업으로 살아남으려면, 우선 적자 탈출이 시급하다. 3년 연속 적자기업, 자본잠식 기업, 현금흐름 악화 기업에 쉽사리 금융지원이 될 리 만무하다. K의 처가에서 노른자위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해도, 여간해선 은행의 심사를 통과하기 어렵다. 업종 특성상, 외부 투자금을 유치하기도 어렵다.
그동안의 재무제표와 각종 자료를 살펴보니, 매출원가와 판매관리비 절감을 위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도, 작년부터는 인력 효율화를 통해 직접 노무비도 줄이고, 복리후생비, 각종 공과금, 운임, 소모품비 등 경비도 절감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대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부가가치율이 높은, 중소형 커피 프랜차이즈에 대한 거래가 증가하고, 일반소비자 대상 B2C 매출도 시작되니, 잘하면 올해부터는 흑자전환도 가능해 보인다.
10년간 K 대표는 경쟁이 심한 레드오션에서 살아남았다. 아니, 10년을 버텼으니, 성공한 셈이다. 커피 사업은 대표적 완전경쟁 시장이다. K는 이런 시장에서 숱한 악재들을 이겨내고, 포스트-코로나 시대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거래처들로부터 주문이 늘어나니, 원재료와 부자재 추가 확보가 필요하다. 얼마 전, 인천 사업장에 카페도 오픈했기에 운영자금은 더욱 부족하다.
최근 3년간 회사의 재무 상황은 최악이었다. 다행히, 이번에 정책자금이 투입되면, 회사는 원재료를 원활하게 수급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가격 경쟁력과 운영 효율성이 높아져, 재무상황과 자금흐름이 개선될 것이 확실하다. 다수의 수주를 확보해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민 끝에 정책자금 지원을 결정했다. 흔치 않은 대담한 결정이다.
일본 속담에 <복숭아와 밤은 3년, 감은 8년>이라는 표현이 있다. 복숭아와 밤, 감은 씨앗을 심고 나서 열매를 맺기까지, 저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저마다의 응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기다림의 시간이다. 법인은 7년 전 설립됐으니, 올해가 창업기업으로서의 마지막 해다. 더구나, 3년간 계속 적자였으니, 겨우 버틴 셈이다. 그래도 이제 1년 후면, 감나무에 감이 열릴 것이다. 행여 K는 복숭아나 밤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르익은 감>이 그에겐 제격이리라.
사실, K의 인생이 그간 술술 잘 풀리기만 한 것 같아 내심 불안했다. 어쩌면, 최근의 어려움은 그가 조금 더 성숙한 사람, 성공한 기업인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젠, 그의 회복 탄력성을 지켜볼 시간이다. 준비물은 향이 풍부한 코스타리카산 원두커피다. 각성과 회복에는 커피만 한 게 없다.
바야흐로, 커피 전성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