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소명과 덕목
Feat.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국가란 특정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과 강권력의 독점을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다. 그 안에서 권력획득에 관여하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분투노력, 즉 갈등과 투쟁이 바로 정치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과 현실에서의 선택을 일치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인의 내면적 신념윤리는 가치합리적일 수 있으나, 책임 윤리는 목적 합리적이어서 세속적인 정치참여 과정에서 내면의 신념과 달라질 수 있게 된다.
정치란 열정과 책임감, 균형적 판단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해야 한다. 이런 덕목을 바탕으로,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기에 모든 희망이 깨져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민주주의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자신의 목적의식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대중이 그에 호응해서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에 기초를 둔 통치체제와 같다.
냉혹한 정치적 현실주의라 할 수 있다. 카리스마적 정당성에 기초한 지배형태이자, 대중의 의사를 직접 묻는 것에서 의사 결정의 정당성을 찾는, 대중 투표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권력투쟁에 성공한 정치인은 오직 대중의 심판(선거)에 의해서만 권력을 내려놓을 뿐이며, 권력을 쥐고 있는 동안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삼권분립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행정수반에 의해 그 의미가 퇴색하고, 특히 과거 관료들에 의해 지배되던 행정부도 철저하게 정치지도자에게 예속된다. 좋게 표현하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이고, 달리 표현하면, 영혼 없는 공무원의 탄생이다.
권력을 향한 야심은 그가 일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다. 흔히 '권력 본능'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 정치가에게는 정상적 자질의 하나이다.
복음서의 절대 윤리는 전부 아니면 전무를 가리키기 때문에, 정치가라면 만약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명령은 부당하고 사회적으로 무의미한 요구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사랑의 윤리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치가는 정반대의 격언, 즉, '너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의 만연에 대한 책임은 너에게 있다'라는 명제에 따라야 하기 대문이다.
세상의 어떤 윤리도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경우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할 수 있다. 따라서,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조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자신의 영혼 또는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는 사람은 정치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과업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폭력과 강권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