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청소기 신화로 유명한 한경희의 자전적 에세이 <너무 늦은 시작이란 없다>를 읽었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IOC 사무국 사무원, 호텔리어, 유통업체 영업직원, 교육부 공무원 등으로 근무한 후, 서른여섯이라는 나이에 자기 사업을 시작했고, 성공한 중소기업 여성 CEO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헤매고, 넘어지고, 깨지고, 삽질 인생 10년 만에 진짜 인생을 찾았다는 한경희 대표는,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가슴 뜨거워지는 꿈을 꾸며 진짜 인생을 찾아 나서라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 가슴 설레는 충고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여러 직장을 옮기면서 본인의 적성을 찾거나,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는 것 말고 꾸준하게 한 직업(직장)에 전념하는 것도 한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만, 꾸준함이란 안전 지향성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안이함, 도전하지 않는 삶과 꾸준함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꾸준함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는 영광스러운 포상이다. 사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란 없다. 어제와 오늘, 내일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다 처음이다.
숱한 어려움과 시련을 겪고 두려움이 밀려와도 함부로 도망가지 않는 것,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로 결과를 수용하는 것, 주변의 비판과 오해도 감내해 내는 것, 실수를 과감하게 인정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흔히, 한 직장을 오래 다닌다는 게, 단순 반복적인 업무의 연속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발전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오해되고는 한다. 하지만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시각이다.
최소 10년은 한 분야에서 일을 해봐야 비로소 이치(理致)를 파악할 수 있게 마련이다. 또한, 전문가 소리를 들으려면 실무경험과 더불어 꾸준한 공부는 필수다. 짧은 경험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세상이 아니다. 단언컨대, 이제는 단순 반복적인 업무만 처리하고 발전이 없는 직원을 꾸준함이라는 포장하에 보호해 주는 조직은 어디에도 없다.
가끔 30여 년의 근무를 마치고, 회사 게시판에 <감사의 말씀>을 올린 후 퇴직하시는 선배들의 글을 볼 때가 있다. 호기심에 그들의 과거와 역사에 대해 사람들에게 물어보곤 하는데, 역시나 누구 하나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금세 알아차리곤 한다.
꾸준함은 상처와 시련을 견뎌낸 데 대한 최고의 보상임을 잘 알기에, 가장이자 사회의 일원으로 떳떳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지 중 하나임을 알기에, 진작 창업했어도 성공했을 법한 선배들마저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도 30년을 버텨낸 것이리라.
흔히 꾸준함과 평범함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견실한 경제체제 하의 종합주가지수가 상승장, 하락장 등의 등락을 거듭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장기적 우상향 방향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는 것처럼, 지루하되 똑같은 하루는 없고, 꾸준한 투자는 결국 복리의 마법으로 보답하기 마련이다.
행여 30년의 직장생활은 도전 없는 삶으로 평가 절하될 여지도 있다. 정년퇴직이 인생의 정답일 수는 없지만, 꾸준함은 최고의 찬사 중 하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눈팔지 않고 한 분야에서 정진한다는 것은 부단한 수련을 포함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의 슬럼프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인데, 수없이 찾아오는 슬럼프를 잘 극복해 내야만 정년을 맞이할 수 있다.
정년을 맞이할 정도의 나이가 되면 최종직위의 높고 낮음도 큰 의미가 없다. 가족과 친구, 선후배의 진심 어린 축복을 받으며 정년을 맞이한다는 것, 꾸준함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로망일 지도 모른다. 힘든 직장생활, 가끔은 딴 데를 콕콕 찔러보며 적성을 찾아보기도 하고, 취미생활을 해 보기도 하면서, 우리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연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는가. 기업가의 삶이든 직장인의 삶이든, 세상살이가 그다지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자기 실력이나 능력에 자만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하는 한편, 유연하게 대처해야 영광의 30년을 맞이할 수 있다.
일찍이, 철학자 니체는 “너무 이른 성공은 위험하다. 어릴 때 성공해 공적을 쌓고 추앙받으면, 그 사람은 오만하고 비뚤어진 시각에 갇혀 동년배의 사람이나 차근차근 노력해 가는 사람에 대한 존경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다”라고 일갈했다.
맹자도 진예자(進銳者) 기퇴속(基退速), 즉, 나아가는 것이 빠른 자는 그 물러남도 빠르다며, 초년 성공, 소년등과(少年登科)의 위험을 내다보았다.
따라서, 시작이 반이고, 중요한 건 실행력이라는 자기 계발서의 가르침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인생 역전을 노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너무 이른 성공은 독이라는 확신으로,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씩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하는 리얼리스트가 되는 편이 낫다.
100세 시대다. 정년퇴직 이후에도 새로운 도전은 계속된다. 오르막과 내리막은 반복되고, 작은 실패들이 연속된 끝에 작은 성공 하나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이기는 자가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다. 버틴다는 것은 세월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야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흔들리고, 삐걱거리더라도, 버텨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