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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요세프 Jan 06. 2024

비와 당신의 이야기 (1986)

을의 연애

그녀는 예뻤다. 스무 살의 남자라면 누구라도 반할 만한 미모였다.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중·고등학교를 다닌 특권 덕분에, 이렇다 할 대외활동도 없었던 덕에,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데이트는 해본 적이 없었다. 금세 사랑에 빠지는 건 나의 운명이었다.

 

대학생이 되었어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캠퍼스 커플을 상상하면서 힘겨운 수험생활을 버텼지만, 그런 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 남학생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남자 선배들의 외모, 톤과 매너, 지갑 사정 등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주눅만 들었다. 스무 살의 나에게 연애는 별나라 이야기였다.  

   

그러던 차에 난생처음 조인트 MT 이야기가 들렸다. 학교 기숙사 1동의 리더 격인 재범이 형이 주선했다는 후문이다. 넉살 좋은 마당발 재범이 형은 내 고등학교 1년 선배이기도 하다. 모 여대 화학과 96학번 학생들과 무려 1박 2일을 함께 한다는 소식에 귀가 쫑긋했다.    


나를 제외하면 어나 걱정도 했지만, 지연과 학연, 그리고 이렇다 할 경쟁력이 없다는 자체 판단하에 틈틈이 연습해 두었던 기타가, 나를 살렸다. 나름 엄선된 정예 멤버들 틈에 끼기 위해 기타 실력을 과장한 게 맘에 걸렸지만, 남은 기간 연습하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기회는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일단은 거머쥐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나도 <춘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먼저 말을 건넨 건, 내가 아닌 그녀였다. 모두의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나와는 인연이 없으려니 생각했는데, 기타가 묘약이었다. 내가 준비해 간 레퍼토리 단 두 곡에 불과했기에 여차하면 실력 들통날 위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정선의 기타 교실>을 조금 더 연습하고 오는 거였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수습할 생각에 기타를 내려놓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는도, 그녀 전히 내 옆자리지키고 있었.      


지나가던 동기, 선배들이 나를 보고 다 한 마디씩 건다. 축하한다고! 되묻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기타나 배울걸” 하는 동기 환성이의 혼잣말도 들다. 행운이 찾아왔지만, 마냥 기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기회를 움켜쥘 만한 실력과 자신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을의 연애가 시작됐다. 자신이 없어서 늘 소극적이었데, 그녀는 그런 내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었나 보다. 늘 남자먼저 연락하고, 데이트 신청하고, 집 앞에도 찾아와 기다렸는데, 나는 그러질 않았으니, 그녀 입장에는 그럴 만도 했다. 론, 그러질 않았던 게 아니라, 그러질 못했던 거였다.  


그러던 중 그녀가 남긴 장문의 삐삐 메시지를 듣고 이내 정신을 차렸다. 내가 하도 연락이 없어서 자기가 먼저 연락한다면서, 시간 되면 이번 주말 남산에 놀러 가자는 내용이었다. 못 이기는 척 그녀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인 그 순간만큼은 내가 분명 갑이었다. 살다 보면 가끔은 갑과 을의 자리가 바뀌기도 한다.   

   

남산에 다녀온 후에는, 나 홀로 가슴앓이가 시작됐다. 혼자만의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았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어느 날은 편한 친구로 남자고도 했다. 하릴없이 삐삐를 기다려도 답장은 들쑥날쑥했고, 용기를 내 집으로 전화를 걸면, 부재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쩌다 약속이 잡히는 날에했다. 갑작스레 약속을 취소해야겠다는 음성메시지가 잦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그녀의 일방적인 처분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계속 이러다가는, 공부도, 연애도 다 무너지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 남을 터였다. 11월의 어느 비 오던 밤었다. 술에 취한 목소리, 약속을 미루자는 메시지를 듣자마자, 나는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처럼 그녀의 마음이 식었다면, 짝사랑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먼저 이별을 고하고, 군대 가야겠다 심정이었다. 물을 머금고, 그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실은 그녀의 집이 어디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마음이 정리될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마침 겨울비도 내리니, 눈물이 빗물에 가려진다는 점도 썩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던 중 ‘어느 영화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저 앞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순간 고개를 돌린 그녀와 눈도 마주쳤다. 흠칫 놀랐지만, 나는 이내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녀의 옆에는 다른 남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시린 감정을 뒤로한 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벤치의 그 남자는... 내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겨울비 내린 그날 밤, 나는 무척이나 울었다. 비에 비 맞으며, 눈에 비 맞으며!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언젠가 그녀는 내가 나온 고등학교, 내가 살던 동네를 알고 있는 듯이 말했던 적이 있다. 고등학교 동창들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난 그 재범이 형이 알려줬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의뭉스러운 말투, 숨기는 듯한 표정, 오락가락하던 행보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던 쓰라린 경험은, 그러나 나를 변모시켰다. 그녀가 좋아했던 그를 통해 나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됐다. 그의 , 실력, 비전 등히 알고 있었던 터라, 내가 여자라도 그를 선택하리라는 결론이다.


첫사랑이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타고난 환경과 재능이 그 남자보다 부족하다는 이유로, 방구석에 앉아 본인 신세 한탄만 하고 있다가는, 두 번째 사랑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쭙잖은 실력으로 요행만 바라다가는 또다시 패배할  다. 아픔만큼 성숙해야 한다.     


스물여섯, 오랜만에 그녀와 재회했다. 타고난 성정은 그대로일지언정, 나의 톤과 매너, 지갑 사정, 그리고 멘털은 스무 살 때의 그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열등감의 자리는 자신감으로 체됐다. 그녀의 눈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됐다. 어느덧 나는 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뒤늦은 사과를 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다음번에 또 보자는 그녀의 제안, 물론 쿨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을의 연애는 끝이 났다. 우리 마지막으로 재회한 곳은 공교롭게도 김태원과 이승철이 재회한 부활 15주년 기념 공연이었다. <마지막 콘서트>가 열린 그날, 11월의 어느 비 내리밤이었다. 예견된 이별이었다. 

 



1986년, 그룹 부활은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이 노래는 스무 살의 김태원이 작사, 작곡한 곡이다. 거의 4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종종 연주되고, 불리고, 해석되는 부활의 대표곡 중 하나다. 시그니처(상징)는 도입부의 웅장한 기타 사운드, 그리고 마지막 ‘사랑해’라는 가사의 무한반복이다. 약관의 김태원은 이 곡의 기타 연주로 한국의 지미 핸드릭스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미성의 이승철과 탁성의 김태원이 함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가사의 반복적 절규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김태원이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여학생을 생각하며 쓴 곡이다. 친구의 친구를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야기다. 내가 유독 이 노래에 감정이입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가사 속 비는 김태원을 상징하리라. 아이가 눈이 오길 바라듯이, 비는 너를 그리워한다는 첫 소절은, 첫사랑의 아픈 기억을 가진 모든 을의 심정을 대변한다. 사랑도 잃고, 우정도 잃은 남자의 심정은 겪어본 만이 작할 수 있다.

     

사랑할 누구나 시인이라던데, 사랑할 때나 이별할 때나 언제나 죄인이었을 그의 절절한 감정이 노래 전반에 가득 묻어 다. '사랑해'의 반복에는 금기 앞에 좌절해야만 하는 의 상실감, 열등감, 자책감, 회한과 안타까움이 응축되어 있다. 쓰라린 좌절감과 시련 불후의 명곡을 낳다.   

  

스무 살의 김태원을 단련시킨 건 팔 할이 열등감이다. 그는 여러 차례 방송을 통해 자신의 오랜 콤플렉스를 고백한 바 있다. 다행히 그는 부족함에 마냥 좌절하지 않고 기타에 집중했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꾸준하고 성실하게 파고들었다. 기타리스트 신대철을 보고 속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자, 이번에는 과감하게 방향을 틀어 작곡에 몰두했다. 1980년대 한국 록(Rock) 음악 르네상스 시절, 헤비메탈이 아닌 아름다운 곡 선율과 가사로 승부한 한국형 그룹사운드 부활은 이렇게 탄생했다.    

 



누구나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를 흠모하느니, 차라리 적당한 열등감과 질투심을 토대로 평생 꾸준하게 실력을 쌓아 올린, 2인자 살리에리를 하는 편이 낫다. 단, 다른 이의 타고난 재능에 쉽사리 포기하거나, 상대방을 폄훼하지 않는 살리에리가 되어야 한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실제 살리에리는 수많은 당대의 음악인과 대중에게 사랑받은 고전음악의 대가이자, 스테디셀러다.  

   

김태원이 만약 삼각관계에서 사랑을 쟁취했다면, 기타 속주에 능했더라면, 아름다운 미성이었다면, 단언컨대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세상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김태원은 신대철에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이승철은 임재범에게, 그리고 나는 서울대생 벤치남에게 열등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 콤플렉스야말로 을의 돋보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싱어게인 3>에 출연한 20년 차 어느 무명 가수가 자기만의 스타일로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다. 무대를 마친 후, 그는 가수 인생 내내 자기 목소리가 콤플렉스였음을 고백다. 그의 노래를 듣고 난 40년 차 심사위원 임재범이 평다. 그가 곧 노래고, 노래가 곧 그였다고. 다른 이는 자기 전성기는 자신이 정한다는 말로 그에 대한 심사평을 대신했다. 열등감은 성장의 디딤돌이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부족하되 도전할 줄 아는, 모든 을들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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