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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요세프 Jan 12. 2024

긴 하루 (2004)

워크아웃

태영건설의 워크아웃이 개시되었다. 금융채권자협의회의 동의율은 96.1%다. 채권자의 동의율이 75% 이상일 경우 워크아웃이 개시될 수 있다. 워크아웃(Work-out)은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작업을 의미한다. 이제 태영건설은 모든 금융채에 대한 상환을 유예받고, 외부 전문기관을 통해 회사의 자산실사를 받은 후 계속기업으로서의 존속 가능성을 평가받게 된다.    

  

이후 태영건설의 정상화 가능성이 인정되고, 지주회사와 계열사, 대주주들의 고강도 구조조정 계획이 충실하게 이행된다면, 채권자들은 채무조정은 물론, 신규 자금지원까지 검토하게 된다. 사실상 채무불이행(디폴트)에 처한 기업에 다시 한번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건설업계, 부동산 시장, 더 나아가서는 국민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태영건설의 금융채무 규모는 무려 수조 원대다.   

  

태영건설이 자금난에 처한 이유는 사업성 저하로 인한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의 부실화다. 건설 부동산 경기의 침체와 금리 인상, 원자재 가격의 상승, 수익형 부동산 미분양, 공사 지연 등이 겹치면서 회사의 자금 유동성이 한계에 봉착했다.


그 와중에 대출금 만기가 도래했으니, 개별 금융회사는 대출 기한을 연장해 줄 명분과 실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별 채권자의 이익만을 고려해 기존 담보물 처분, 예·적금 상계, 우선변제권 청구 등에 임하는 경우 건설회사뿐 아니라, 관계기업, 협력업체,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 수분양자, 건설업계 전반의 연쇄 위기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채권자들이 협의회를 구성해 워크아웃을 검토하기에 이른 것이고, 금융당국도 이러한 과정에 적극 개입할 수밖에 없다.

      



단, 대마불사(大馬不死) 식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장, 시중에는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해는 공유화”하느냐는 의견이 돈다. 당연하다. 기업의 자금난, 프로젝트 부실화의 1차 책임자는 기업 자신이기 때문이다. 외부 환경 탓을 해봐야 자기 얼굴에 침 뱉기다. 대한민국 국민의 지적 수준이나 의식, 즉, 민도(民度)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더구나, 태영건설은 국가 핵심기간산업이 아닌, 수많은 건설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스스로 뼈를 깎는 혁신적 구조조정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태영건설은 모래성처럼 무너질지도 모른다.   


워크아웃의 기본은 신뢰 회복이다. 부도 직전의 회사에 재기의 기회를 주는데, 공정과 상식의 잣대를 대는 것은 당연하다. 한 기업에만 특혜를 준다는 오해를 부르면 안 된다. 본인의 채무상환 유예, 탕감, 더구나 추가자금 지원요청까지 한다는 건 은행을 비롯해 수백 개 채권자들에게 손해를 떠넘기는 일이다. 그런데, 일반 국민이 대부분 금융회사에 예금, 적금 등을 보유한 채권자이거나, 대출을 이용 중인 고객이라는 점에서, 기업의 워크아웃 개시는 사실상 사적 채무가 공적 채무로 전환된 일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기업의 고통 분담, 고강도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다. 대주주의 사재출연과 지분 매각, 핵심 영업 활동 외 자산 매각, 관계사(계열사) 지분 매각 등을 통해 회생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수십 년의 역사와 경험, 노하우(Know-how)를 이 사회의 자산으로 다시 인정받으려면, 과거 실패를 인정하고, 기꺼이 책임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집단지성을 통한 정상화, 그리고 손실의 최소화가 가능할지 지켜볼 일이다.  




워크아웃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한, 누구나 성공과 실패, 재기를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나 역시 그러하다. 나의 워크아웃 역사를 기록해 본다.   


회사생활의 권태로움이 유독 크게 느껴지던 시절,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공격적 투자를 감행했다. 오래전에 사둔 제주도 땅을 팔아서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수천만 원을 투자했다. 하루 이틀 정도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밥값은 천 원 단위로 고민하면서도, 막상 수천만 원의 투자의사 결정은 이토록 신속했다. 그러면서도 어쭙잖은 나의 통찰력, 직관력을 과신했다.      


비용 편익 분석, 상권 분석, 인력 운영 방안 고민은 없었다. 동업자에게 지나치게 의지한 나머지, 당장 눈앞에 처한 영업난, 인력난도 어떻게 해결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저, 가게가 잘되길 기도하고, 내 주머니를 털어 그곳에 가 셀프 소비하는 게 다였다. 결코 잘 될 리가 없는 나몰라 투자였다.  

   

바이오기업 주식에도 수천만 원을 투자했다. 회사에서 주력으로 개발 중인 신약, 파이프라인, 특허 보유 현황을 공부하기는커녕, 함께 일하는 동료 직원의 말만 믿고, 부동산 매각 수익 전액을 투자했다.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팔라는 격언에는 충실했으나, 결과적으로 투자 원금의 30% 이상을 손해 봤다. 알고 보니, 기술적인 준비가 덜 된 회사였다. 경제적 손실도 손실이지만, 투자 추천자를 원망하는 나 자신이 더 원망스러웠다. 전직 증권회사 직원, 명색이 경영학 박사가 누굴 탓하겠는가.     


투자 실패는 온전히 나의 책임이다. 공부가 덜 된 상태에서 성급의사결정을 내린 이었다. 행여 초기수익률이 높았다 하더라도, 그건 오롯이 초심자의 행운이었으리라. 남에게 의지하려는 태도도 문제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비정상적으로 증가했던 비대면 배달문화가 오랜 기간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던 것 역시 나의 판단 착오다.

   



그러나, 한 가정의 가장이 이대로 회생, 파산절차로 직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즉시 자체적인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불필요한 소비 지출을 제한했다. 자가용도 매각했다. 신속한 구조조정 덕분에 버스 타는 묘미, 걷는 재미, 점심 도시락의 참맛도 알게 됐다. 건강 개선은 덤이었다.


친구가 대주주로 참여 중인 벤처기업, 사촌 동생이 직접 운영 중인 전도유망한 스타트업의 초기 투자자가 되어 회사의 성장방안을 함께 고민하고, 영업사원을 자처해 틈나는대로 회사와 상품을 홍보하기도 했다. 가끔 먹는 커피, 짜장면, 치킨도 내가 투자한 회사의 제품을 애용하는 것으로 가치투자자로서 삶을 지향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나의 실패담을 알리고, 재정 상황을 공유한 후 용서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솔직함이 신뢰 회복의 지름길이다. 아내는 너른 마음으로 나를 이해해 줄뿐더러, 육아휴직을 중단하고 계획보다 일찍 복직했다. 덕분에 현금수지가 대폭 개선됐다. 투자기업 무럭무럭 성장 중이고, 뉴타운 지구 재개발 사업도 순항 중이며, 20년 이상의 직장생활로 퇴직금도 계속 쌓여가고 있으니, 나의 워크아웃은 순조로운 마무리가 예상된다.    

  



2004년, 이승철이 발표한 <긴 하루>도 워크아웃의 결과물이다.


그는 2002년 김태원과 15년 만에 다시 만나 발매한 <Never ending story>로 화려하게 <부활>했으나, 얼마 후 다시 헤어졌다. 둘 사이의 갈등설, 불화설 등 각종 말들이 난무했다. 여하튼, 불세출의 크리에이터 김태원과의 이별로 그는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

      

홀로서기라는 운명에 처한 이승철의 선택은 신예 작곡가 전해성, 그리고 <긴 하루>였다. 그는 다시 시작한다는 심정으로 가창에 변화를 줬다. 예의 화려한 가창력, 바이브레이션은 모두 덜어냈다. 최대한 담백하게 노래 불렀고, 곡의 구성도 단순화했다.


김태원의 기타, 채제민의 드럼, 서재혁의 베이스가 없으니 불안할 법도 했지만, 그는 거꾸로 힘을 뺐다. 처음 발표 당시에는 팬들조차 이승철의 목소리가 아닌 줄 알았다는 평이 많았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의 노래는 어색하지만, 신선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애절하게 소리높이던 그가, 평범하고 고단한 일상을 읊조리듯 노래하자, 대중은 오히려 환호했다.


어쩌면, 그에게 김태원과 부활은 기댈 수 있는 큰 자산임과 동시에, 짊어져야 할 큰 부채였을지도 모른다.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산규모(=부채+자본)가 커야 하지만,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자산도 부채도 줄여야 한다. 자기 자본만으로 승부를 본 결과가 <긴 하루>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그해 겨울, 나이 마흔에 아이돌 가수들 틈에서 10대 가수의 영예까지 얻었으니, 이승철의 워크아웃은 성공한 셈이다.  

   

워크아웃, 즉, 구조조정은 언뜻 외부인에게 운명이 맡겨지는 것 같지만, 실은 본인에게 성패가 달려있다. 본인 주도하에 새로운 미래 비전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개선 의지를 피력할 때 외부의 지지와 응원 받을 수 있다. 자기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있는 그대로 펼쳐 놓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이승철 밴드의 이름이 <미래로>였던 것처럼, 시련을 겪었어도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보아야 한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다. 독불장군은 75%의 동의를 받기 어렵다. 책임지는 자세, 진정성 있는 모습이 선행되어야 신뢰를 회복하고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워크아웃은 위기이자,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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