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기업 CEO들을 만난다. 이런 삶을 산 지도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었다. 기업에 금융을 공급하는 일이 직업이니, 기업과 기업가에 대한 신용조사와 평가를 하는 일은 나의 일상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MBTI가 유행인데, 나의 경우엔 상대방에게 꼭 묻지 않아도 CEO의 스타일을 파악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한 마디로, 척 보면 척이다. 열에 아홉은 나의 직관이 맞아떨어진다. 무럭무럭 성장할 것 같은 기업은 실제로 그렇게 되고,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던 기업은 얼마 후 여지없이 무너진다. 기업 성패의 핵심 요인이 CEO의 역량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CEO 역량이라는 게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영역인지라, 교과서적으로 열거하기는 어렵다. 기업 성공의 핵심 요소라는 게 정말 있는 거라면, 그 방식을 따라 누구든 창업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성공방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이 보유한 내부적 역량과 처한 외부 환경은 모두 제각각이니, 상황별 맞춤전략이 있을 뿐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사업 아이템이라 하더라도, 때마침 관련 산업이 쇠퇴기거나, 시장 수요가 부족하거나, 마케팅이 잘못되었다면, 공든 탑도무너질 수 있다. 수많은 기술 기반 벤처기업, 특허권 등 지식재산권 보유 기업이 수십억 대 투자를 받고도, 얼마 못 가서 부도 처리되거나, 폐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느 회사든 설립 후 3~7년 내 도래하는 죽음의 계속(Death valley)이라는 성장통을 이겨내야 계속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CEO의 참역량은 위기의 상황, 즉, 인력난, 영업난, 자금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사실, 기업의 기술력, 영업력, 인적 경쟁력은 전부 자금유동성과 연결되기에, 기업가는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때 되면 금융기관을 찾기 마련이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SOS를 요청하는 일도 많고, 어쩔 수 없이 요청을 거절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경제적 손실을 더 키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위기의 상황에서 파트너를 속이고,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CEO도 마주하게 된다. 작정하고 사기 치려는 사람을 당해낼 재간은 없다. 경찰 있다고 도둑 없어지겠느냐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어엿한 CEO가 하루아침에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고통스럽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절감하게 된다.
열에 아홉 제대로 평가하더라도, 열에 하나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한다면, 행여 원치 않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도, 공공부문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을진대, CEO가 개인의 경제적 이익만을 노리고, 상대방을 속이는 기회주의적행동을 하면 그 파장은 크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컴퓨터 부품 도·소매업체를 운영하던 김 대표가 그러했다. 그는 지난 십수 년 간 회사를 꾸준히 성장시키면서 동종업계 관계자들과 거래처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은행과 정책금융 기관으로부터 별도의 담보물 없이도 20억 이상의 기업 여신을 제공받을 정도로 높은 신용을 유지했다. 그러던 그가, 불과 며칠 사이에 회사가 보유 중이던 재고상품을 덤핑(가격할인) 판매한 후, 사업장 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
6개월 전 마지막으로 지원받은 구매자금 대출 수억 원은 결국, 그의 노잣돈으로 활용된 셈이다. 부리나케 회사로 찾아가 보았지만, 굳게 닫힌 셔터와 방치된 우편물, 독촉장만이 눈에 띌 뿐이다. 관리사무소에 문의하니, 두세 달 전부터 월세와 관리비도 연체 중이라고 한다. 주채권은행에서도, 얼마 전 상품 판매 대금이 전액 인출되는 바람에 지난달부터 대출 원금과 이자 연체가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와 거래하던 아래층 기업 역시 그래픽 카드 납품 대금 일억 원 이상을 떼였다.
그는 작정하고 모두를 속였다. 위기를 대하는 최악의 태도다. 개인적으로 십수억 원을 편취하는 대신, 수많은 거래처와 은행, 카드사, 고객들, 심지어 직원들까지 곤경에 빠트렸다. 성실하고 선량한 기업가에게 제공되어야 할 공적 자금에도 손실을 끼쳤다. 살펴보니 본인 명의 재산은 이미 처분한 지 오래다. 아마, 가족이나 친척 중 누군가의 명의로 세탁해 두었을 터다.
연대보증인 제도가 유명무실해졌으니, 이제 채권자가 CEO 개인에게 채무상환 독촉을 할 수도 없다. NPL(부실 채권) 담당자가 하루 세 번 이상 전화하거나, 일몰 이후 그의 집 초인종이라도 잘못 눌렀다가는 도리어 처벌받을 수 있다.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 고금리의 장기화로 인해 영세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서민층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선거철이 다가오니, 전가의 보도처럼 신용 대사면 이야기도 나온다. 방향성에는 찬성한다. 누구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자든, 주식 투자든, 코인 투자든, 창업이든 도전했다가 실패할 수 있다. 더구나, 사업은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그렇다고, 창업을 막을 수는 없다. 창업이 지속되지 않으면, 사회는 퇴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도덕적 해이만큼은 막아야 한다.고의적 실패자에게까지 재기의 기회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회생, 파산, 면책 제도는 자본주의 사회 최후의 파수꾼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실한 실패자, 타인에게 의도적인 손실을 입히지 않은 사람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 천편일률적인 기준말고,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악마는디테일(Detail_세부사항)에 숨어 있다.
실패 이후의 태도가 중요하다. 일시적 시련이 영원한 실패로 이어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어려움을 인정해야 다음을기대할 수 있다. 숨지 말고, 차라리 먼저 상대방을 찾아가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물론, 돈 문제라면 이해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달리 방법은 없다.비난과 비판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용기야말로 CEO가 갖추어야 할 제1 덕목이다. 있는 재산 내어놓은 후 워크아웃이든 회생이든 신청해야 채권자와 거래처, 임직원의 동의를 구할 수 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전화기를 켜두어야 다음이 있다.
2015년, 이승철은 데뷔 30주년을 맞이해 12집 앨범 <시간 참 빠르다>를 발표했다. <시련이 와도>는 그중 한 곡이다. 그의 인생이야말로 시련의 연속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는 스무 살의 나이에 <부활>의 리드싱어로 데뷔하자마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이내 숱한 시련도 겪었다.
전성기를 보내다가 한순간에 추락한 적도 있다. 실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숨거나 피하지 않았다.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른 후에도, 마냥 두문불출하지 않고, 이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노래하며 30년을 버텨냈다. 강한자가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는 자가 강한 것임을 시간으로 증명했다.
방송 출연 정지 기간 수년 동안 콘서트를 계속해 우리나라 가수 중 최초로 <라이브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사죄의 의미로 공연 수익금의 상당액은 심장병 어린이 돕기에 쾌척했다. 누군가는 이미지 메이킹이라 욕할지언정,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덧선한 영향력은 그가 수십 년간 공연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프리카 차드 우물 짓기, 탈북 청소년 합창단과의 독도 공연, UN 공연 등은 30년 된 심장병 후원 콘서트의 연장선에 있다.
공교롭게도, 이승철 30주년 기념앨범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직접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에 깊이 관여하고, 신인 작곡가들의 곡도과감히 수용했는데,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경륜과 도전이라는 투트랙 전략으로 앨범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대중의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불과 2년 전 발표했던 <My Love>의 큰 성공과는 대비되는 결과이니,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시련이었으리라.
<시련이 와도>는 앨범 수록곡 중 유독 그가 애정을 쏟았던 1번 트랙이다. 절망 속에 겪는 깊고 험한 시련이라도, 결코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받아들이며 나아가자는 노랫말을 담고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CCM 곡을 리메이크했다고는 하나, 꼭 종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나의 길에 험한 산과 깊고 깊은 바다 같은 시련이 와도, 나의 능력을 믿고, 어두움에 홀로 슬피 울지 말고 디딤돌 벗 삼아 앞으로 나아가자"는 가사는 울림이 크다.
이 노래에는 간절함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일부러 목소리 상태가 안 좋을 때 녹음했다고 한다. 덕분에 노래는 더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그런데, 가수는 노래 제목 따라간다는 속설의 영향탓인지, <시련이 와도>는 상업적으로는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그는 여전히 40주년을 눈앞에 둔 현역 가수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고, 이앨범역시 그의 소중한 필모그래피로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만으로>충분하다.
천하의 이승철이 정성을 다해 부른 노래도잘 안 됐다니,오히려 시련을 담은 노랫말이 더 크게 다가온다.시련이라는 게 우리네 삶에 익숙하기 때문이리라. 그도 별수 없이 평범한 인간 중 한 명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레 다가온다. 가요계의 전설 소리를 듣는 그가 발표하는 노래도 <외면> 받는다. 그렇다고, 내가 부른 노래의 가치를 대중이 몰라준다고 줄곧 심드렁해하거나,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진즉 흘러간 가수로 사라졌을 것이다.
다시, 실패 이후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회사원도, 가수도, 사업가도, 정치인도 모두 시련을 겪는다. 하지만, 모두가 김 대표처럼 몰래 숨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가 처한 어려움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여긴다. 그러나,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공평하다.
본인이 감당해야 할 짐을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다음이 있다.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공감(共感)은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는 한, 시련은 불가피하다. '어두움에 홀로 슬피 울지 말고 디딤돌 벗 삼아 앞으로 나아가려는 한', 시련 앞에 솔직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