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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요세프 Mar 22. 2024

오직 너뿐인 나를 (1999)

돈에는 냄새가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활동 인구는 약 2천8백만 명이다. 그중 월급쟁이는 대략 2천만 명 정도니, 70% 이상은 남이 주는 급여를 받으며 사는 셈이다. 회사원이든, 전문가든 혹은 사업가든 간에, 모두의 인생은 특별하지만, 굳이 나누자면, 월급 받으며 회사 다니는 것이 평범하게 산다는 말과 제일 가깝다.  

    

굴곡 많은 인생이라 자평하지만, 실은 나도 평범한 회사원에 불과하다. 매월 21일에 월급 받아 생활비, 아이들 학원비, 은행 이자, 월세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서울살이의 팍팍함을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사는 중이다. 월급 인상률이 물가 인상률을 한창 밑돈 지도 벌써 수년째다. 이 모든 건 공공기관을 직장으로 선택한 내 복이다.

     

스물여섯에 입사했으니, 만약 정년까지 다닌다면 무려 35년을 직장인으로 사는 셈이다. 인생 이모작, 삼모작 이야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35년을 한 회사에 다닌다는 건 누가 뭐래도 큰 축복이다. 직장인이니 돈,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은 어느 정도 내려놓는 게 상책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조직 안에서도 명예(자리), 권력(승진)을 향한 암투와 경쟁은 늘 존재한다.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온 이기적 유전자는 어쩔 도리가 없다. 소시민으로 무탈하게 사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의사, 변호사, 회계사, 연예인 등 특정 직종의 고소득 전문직이나 성공한 사업가,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은 금수저를 제외하면, 십중팔구(十中八九) 대부분 사회인은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게 전부다. 생활 수준을 월급에 맞춰 살다 보면, 거기에 익숙해진다. 마음도 편하고, 어디 가서 욕먹을 일도 없다.

     

그러나, 살다 보면 불현듯 퇴직, 독립, 그리고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떠올리게 된다. 평생 남이 주는 월급만 받고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모두 자신만의 특별한 인생 스토리를 원한다. 비범하지 않은 인생은 하나도 없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묘비명은 사절이다. 그러려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살아가야 한다. 작은 성취, 작은 실패를 계속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내 삶의 전부로 여겨지는 회사, 조직 그 이상을 볼 수 있다. 삶의 변주가 없으면, 고통과 권태만 반복될 따름이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오늘 만난 CEO, 정 대표는 모텔을 운영한다. 자그마치 3개나 된다. 본인, 배우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후배가 맡아서 관리하는 중이다. 예전 같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웬일인지 자꾸만 그에게 관심이 간다. 그가 어떤 계기로 모텔업에 종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직업 만족도는 어떤지, 몸이 고생하는 만큼 벌이는 괜찮은지, 궁금증이 이어졌다.

      

정 대표의 후배가 의사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커진 듯하다. 명실상부한 전문직에서 모텔 관리인으로의 변신이라니! 아무리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놀랍다고 해서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돌아갈 곳 있는 자의 한낱 일탈, 여유로움의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의사의 외도(!)를 보고 있자니, 거꾸로 왜 다들 전문직, 전문직 하는지 더 잘 와닿기도 한다.

     

오늘의 주인공 정 대표는 나와 비슷한 또래다. 그도 30대 중반까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대학에서 사진과 영상을 전공한 그는, 중견 IT 기업에서 웹디자이너로 십 년 이상을 근무했다. 권태와 고통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던 직장인이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우연히 모텔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힘에 부친 누군가가 모텔을 싸게 내놓았다는 소식도 들렸다. 한 달간의 체험과 고심 끝에, 그는 모텔을 인수했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쓴 선택이었다.


역세권 뒷골목에는 음식점과 술집뿐만 아니라 모텔도 많다.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불철주야(不撤晝夜) 모텔은 성업 중이다. 정 대표가 모텔을 인수한 얼마 뒤, 코로나가 창궐하며 자의 반 타의 반 모텔을 찾는 사람들은 더 늘었다. 팬데믹은 예측불허의 행운이었다.

    

외형성장의 비결이라고 해 봤자, 깨끗하게 청소해서 객실의 청결을 유지하는 게 전부다. 그가 솔선수범하니, 다른 직원들도 대충대충 일할 수는 없었다.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서 고정급이 아닌, 매출액에 비례해 월급이 올라가도록 급여체계를 바꾸었더니, 직원들의 근로의욕은 한층 고취되었다. 매출 상승도 뒤따랐다. 자연스레 선순환 구조가 구축됐다.


의외로, 본인 신분을 노출하는데 별다른 거리낌 없는 고객들도 많다. 하긴, 숙박플랫폼으로 예약하고 찾아오는 게 일반적이니, 숙박업소(모텔, 호텔)는 더 이상 쉬쉬하면서 몰래 찾는 음지의 영역이 아니다. 가족, 친구, 연인이 다양한 이유로 이곳을 찾는다. 플랫폼 말고, 직접 전화로 예약한 손님에게 숙박료와 음식 가격을 할인해 준 후로는, 단골도 많이 늘었다. 친절과 청결, 그리고 요금 할인이면 만사 오케이다.

    

매장 주변의 분식집과 음식점을 섭외해, 고객이 간단한 먹을거리를 QR코드로 주문할 수 있게 한 점도 매출 증가에 한몫했다. IT 기업 출신 CEO의 특별할 것 없는 아이디어에 불과하지만, 생각만 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의 차이는 확연다. 갓 조리한 음식이 바로 배달되니, 음식 매출이 숙박 매출을 넘어서는 날들이 속출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지났고, 정 대표는 어느덧 여러 개의 모텔을 운영하는 총괄 CEO가 되어 있다. 건물 월세와 인건비 외에는 특별한 매출원가가 없어 영업수익률이 높기에 가능한 결과이기도 다. 40대 CEO의 체력, 실행력, 그리고 인간의 타고난 본능(!)에 주목한 점이 성공 이유다.

      

물론,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사람들의 시선이다.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상,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 자랑하고 다닐 만한 비즈니스는 아니라는 생각 가끔 든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고객에게 효용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일이기에 거리낄 건 없다.




프랑스 속담 중 돈에는 냄새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근원은 이러하다. 로마 제국에서는 세탁업자들이 공중화장실의 오줌을 모아 큰 통에 담아 보관했다. 오줌 속 암모니아 성분 덕에 빨래를 그 안에 담그면 하얗게 표백이 되기 때문이다. 오줌통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나지만, 담갔다 뺀 빨래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세탁업자들이 돈을 많이 버니, 그들에게서 걷는 세금도 많았다. 황제(정부)로서는 돈에는 냄새가 없다고 선언할 만다.


자기 하기 싫어도, 누군가 해줬으면 하는 일. 거기에 돈 버는 길이 있다. 로마 시대, 조선 시대, 21세기 대한민국 다 마찬가지다.


우리 속담 중에도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다. 흔히들 이 말을 돈 벌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어서 정승처럼 떵떵거리면서 쓰고 산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원래 의미는 아무리 미천하고 험한 일로 돈을 벌더라도, 그 돈을 쓸 때는 뜻깊고 보람 있게 써야 한다는 뜻이다. 이 속담이야말로 정 대표가 시금석(試金石)으로 여겨야 할 말이다. 돈 벌어서 가족들과 여행 많이 다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주변 사람들까지 도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최종 목표는 유기견 10만 마리의 보금자리 마련이다. 원대한 프로젝트만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지금도 보육시설이나 자선단체에 정기적으로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한다. 웬만한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금액을 복지기금으로 조성해서, 버림받거나 소외된 이웃들(유기견 포함)이 세상의 온기를 느끼도록 도울 예정이다. 구체적인 일정과 목표금액까지 세워둔 걸 보니, 장기 프로젝트의 실현 가능성은 크다.  

    

쉼터를 제공한다는 점은 지금의 모텔 사업과도 맞닿아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 대표는 다 계획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업이 잘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99년, 이승철은 <오직 너뿐인 나를>을 발표했다. 팝 발라드의 전형을 보여주는 곡이다. 세련된 편곡 스타일에 30대 초반 이승철의 미성이 더해지니, 대중에게 제대로 어필하는 노래가 탄생했다. 애절한 노랫말, 애수(哀愁) 어린 목소리, 쭉쭉 뻗는 고음은, 이승철 표 발라드곡 중 하나로 오랫동안 애창됐다. 한동안 뜸했던 이승철의 20세기 마지막 히트곡은, 그로부터 20년 후 악동뮤지션(찬혁)과 함께 한 무대(유희열의 스케치북)를 통해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1996년 발표한 <오늘도 난>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으나, 이후 그는 침체기를 보냈다. 이혼의 아픔, 시련 이후 발표한 <Deep Blue> 앨범의 실패까지, 고통의 시간은 지속됐다. 1999년 앨범 수록곡 목록에도 원래 <오직 너뿐인 나를>은 없었다.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외국 곡의 멜로디가 너무 맘에 든 나머지, 그는 하룻밤 사이 노랫말 쓰고 제목 정하고 노래마친 뒤, 부리나케 앨범의 마지막 으로 실었다. 그런데, 오직 이 한 곡이 가수를 살렸다. 히트곡은 힘들이지 않고 뚝딱 만들어진다는 오랜 불문율, <아이러니>한 공식이 이번에도 들어맞았다. 눈과 귀를 열어두니, 그에게도 예측불허의 행운이 찾아왔다.


특이한 건, 그가 <오직 너뿐인 나를>의 댄스 버전도 발표했다는 점이다. 지금 들어도, 이 편곡은 어딘지 어색하다. 개인의 취향은 제각각이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그러하다. 애이불비(哀而不悲), 슬퍼도 겉으로는 슬픔을 감추는 게 고수라지만, 춤추고 노래 부르면서까지 떠난 임을 그리워하는 건 별로다.


이즈음 이승철은 수많은 히트곡을 댄스 버전으로 편곡해, 전국 방방곡곡 나이트클럽에 순회공연을 다녔다. 길거리에 버려진 나이트클럽 포스터 속에서 그의 모습을 보았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자타공인 최고의 가수라 불리던 그가, 대관절 무슨 나이트클럽 출연이란 말인가. 춤추는 사람들 틈에서 부르는 <오직 너뿐인 나를>이 발라드곡일 수는 없었을 터다.   




시간이 흘러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당시 나이트클럽에 출연해서 번 돈으로, 본인 명의의 녹음 스튜디오도 짓고, 악기와 음악 장비도 많이 살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전열을 재정비한 이승철은 김태원과 다시 만나 불후의 명곡 <Never Ending Story>를 발표하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에게 밤무대는 한낱 사치가 아닌, 고심 끝에 내린 선택이자, 승부수였던 셈이다.  


30대 인기가수의 체력, 실행력, 그리고 인간의 타고난 본능(!)에 주목한 점 성공의 밑바탕이었다. 정 대표의 그것과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쿵저러쿵하는 남들의 이야기, 시선에 지나치게 신경 쓰면, 될 일도 안 된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자리에 당대 최고의 가수가 나타나 댄스파티를 개최하니, 관심이 몰리는 건 당연하다.

고객만족으로 그의 치는 극대화된다. 틈새시장 공략에 성공한 공급자의 연료는 이제 부르는 게 값이 된다. 


돈에는 냄새가 없다. 불법, 탈법, 그리고 누군가의 불행을 조장하는 일이 아닌 한, 세탁업자, 모텔업자, 가수가 돈 많이 번다고 손가락질할 필요 없다. 차라리, 부러우면 부럽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편이 낫다. 모두가 정승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면, 자본주의는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거다.


가수 이승철이 오른 무대 중에는 독도도 있고, UN 본회의장도 있고, 평창 동계 올림픽 스타디움도 있다. 이 무대에 오르면 일류, 저 무대에 오르면 삼류 가수로 급이 나뉠 리 없다. 사람의 품격은 지금의 무대(배경)가 아닌, 비전(Vision)으로 드러난다. 돈벌이, 그 이후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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